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표현하면 두 가지가 느껴진다. 후련함과 찝찝함. 개운하지만 않은 이유는 흥분하면서 나의 약점을 보인 것 같아서다.
자신의 감정을 당당히 말하는 게 이젠 부끄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예전엔 감정 표현이 무조건 좋다고 느꼈다. 지금은 선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있는 말을 자기 편하자고 다 드러내면 상대가 불편할지 모른다.
나는 1남 3녀 중 셋째 딸이다. 우리 사 남매는 사이가 좋은 편이다. 예전에 사람들이 사이가 어쩜 그리 좋은지 종종 물었다. ‘어릴 때부터 사이좋았고 대화를 많이 했어요.’라고 했다. 지금 생각은 좀 다르다. 첫 번째 이유는 언니들이 나와 동생을 잘 돌봐줘서다. 가르치지 않아도 첫째가 하는 것을 동생들이 자연스레 배웠다. 언니가 한 대로 서로 사랑을 줬다. 두 번째 이유는 깨달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잘 참아서다. 서로에게 서운하다거나 기분 나쁜 걸 참고 말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한참 고민한다. 좋지 않은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알아서 조심스레 대했고 감정 상하는 일이 없었다.
책 『제인에어』의 주인공 제인은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게이츠헤드 저택에서 외삼촌집에서 자란다. 외삼촌이 세상을 떠나고 외숙모 리드부인과 사촌에게 괴롭힘을 당하는데 제인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표현한다. 한 번은 제인이 리드부인에게 오해를 사 억울함을 이야기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처음으로 복수하고 난 뒤의 감정이 어떤지 맛보았다. 그것을 처음 삼켰을 때는 따뜻하고 향긋하지만, 마신 다음에는 쇠 맛이 나고 건강에 해로운 향기로운 포도주 같았다. 독약을 마신 기분이었다. _샬럿 브론테 『제인에어』
제인은 흥분한 상태에서 폭발하듯 말을 쏟아내 자신이 뱉은 말이 독약을 마신 기분이라 했다. 좋은 감정 표현이 아니었다. 내 마음을 잘 전달한다고 해서 상대가 ‘네 마음 이해한다.’ 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반응이 나올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감정 전달은 중요하다. 표현하지 않고는 상대가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화냈을 때 제인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상대가 잘못한 일이었는데 미안하다고 하지 않아 흥분하며 목소리가 커졌다. 곧 쓰디쓴 술을 마신 것처럼 속이 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화가 난 뒤에야 후회가 밀려왔다. 지나 보니 상대의 말을 들어보고 차분하게 따질 수 있었지만 후회되었다.
제인의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면서 안타깝지만 않았다. 스스로 독립하도록 노력하는 모습에 안심되었다. 집을 나와 혼자 사는 것만이 독립이 아니다. 제인처럼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며 표현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나와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도 독립이다.
부모나 보호자에게서 독립은 쉽지 않다. 성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가능하다. 신체적으로 힘들면 마음을 분리하면 된다. 제인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거나 부모라는 이름을 이용해 함부로 자녀를 괴롭히는 가정에서는 더욱 필요하다.
마음의 독립은 보호자에게 영향을 받지 않도록 자신만의 힘을 키우는 것이다. 쉽지 않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된다. 스스로 좋아하는 걸 만들고 위험으로부터 마음의 방어벽을 세워야 한다.
제인에게 위로가 된 건 책이었다. 그리고 친구였다. 이해되지 않는 자신의 상황을 달래주는 안식처였다.
마음이 단단하면 인간관계에서도 다르다. 제인을 사랑하는 로체스터라는 남자를 만나서도 상황을 스스로 이끌어 나간다. 자신이 약하다고 여기거나 불쌍하다고 생각했다면 처음 고백받았을 때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제인 에어
엄격한 속박이나 너무 지나친 정체는 남자에게와 마찬가지로 여자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여자보다 특권적인 위치에 있는 남자들이 여자는 푸딩을 만들고, 양말을 짜고, 피아노를 치고, 주머니에 수나 놓으며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속 좁은 짓이다. 관습상 여자답다고 규정된 것을 넘어서서 더 배우고자 하고 더 일하고자 한다고 여자를 비난하거나 비웃는 것은 경솔한 짓이다. _샬럿 브론테 『제인에어』
19세기 영국에서 책이 나왔을 때 획기적이었을 것이다. 보수적인 사회였지만 책에선 남자와 여자가 하는 일을 구분 짓지 않았다. 지금도 제인의 태도를 칭찬하며 많은 사람들이 인생 책으로 꼽는다.
제인은 생각지도 못한 작은 아버지에게서 2만 파운드를 상속받았다. 그 후 제인의 인생이 술술 풀리거나 풍족하게 살았다는 내용으로 예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사촌들과 유산을 나눴다. 제인에게 처음엔 유산이 부담이었지만 나눠줌으로 ‘생명과 희망, 즐거움’이라 느꼈다. 나는 이 부분이 좋았다. 제인에겐 과거의 상처가 삶을 지배하지 않았다. 그저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게 중요했다.
내 삶을 돌아보면 과거에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후회되는 게 종종 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라볼 때도 그렇다. 이해되지 않는 고생길이 뻔하거나 손해 보는 선택처럼 보일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아니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지거나 변하는 것들이다. 손에 쥐고 있다고 영원하지 않다.물질적으로든 마음으로든 누군가에게 나눠주면 내게도 남는다.
제인은 나중에 시력을 잃은 로체스터를 찾아가 사랑을 느낀다. 사람들은 제인을 바보라 여길지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땐 아니었다. 불행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굴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고독하고 벗도 없고 의지할 데가 없을수록 더욱더 낮아질 존중할 거야.’” 이때 제인이 말하는 자존심은 로체스터가 비난하듯 이기적인 것도 아니고, 엘리엇이 파악하듯 자기희생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희생이나 이기심을 넘어선 진정한 주체성의 주장이다. _샬럿 브론테 『제인에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한다고 해도 내가 가진 마음의 크기로는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알아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절히 선택해야 한다. 나도 쉽지 있다. 모든 선택엔 책임이 따르고 어려운 일일수록 더 가치 있다. 즐거운 선택보다 가치 있는 선택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