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 위 석곽묘에 앉은 신
어제는 하루 종일 바늘 같던 햇살이 오늘은 새벽부터 구름에 숨었다. 머리 위에서부터 팔다리 나를 둘러싼 모든 산아래는 잿빛이다. 낮인데도 어둑신하다. 숲은 더 검고 몇 주 전에 내린 비는 아직도 길을 적신다. 누구라도 들어오려면 길이라도 말라야 하는데 번들번들 물기는 비탈의 흙까지 실어낸다. 고개 숙이면 두 팔로 산 을 갈라 가운데로 좁은 길을 낸 듯한 형세다. 산 초입에 누군가 벌통을 놓았고 좁은 외길은 한여름을 지나며 잡초로 묻힐 뻔했다. 웽웽거리던 벌초 덕분에 그나마 길이 보인다.
제법 이른 시간에 우산 넷이 나타났다. 뾰족한 솔잎에 물방울이 두어 개 달리긴 했다. 노랗고 파란 색깔로 보아 무척이나 오랜만에 오는 이들이다. 이산 저산 나무들이 쳐다본다. 쉿 쉿 바람을 재워가며 가만가만 엿들을 기세다. 쿵더쿵쿵더쿵 뛰어오르던 노루도 멀리 쫓았다. 키 큰 잡초들이 서걱대려다 저들이 몰고 오는 인기척에 도리어 숨을 죽인다. 무얼 싸가지고 오나? 앞서고 뒤서고 달라붙어 킁킁대던 잡신들은 왠지 가까이 가지 못한다.
보통 기세들이 아니다. 바지 입은 아녀자들인데 장군감이다. 주고받는 말 기운이 벌써 사납다. 그러고 보니 같이 온 지 이태만이다. 금방 만났음은 말씨에서 보인다. 저들은 모른다. 자주 만나야, 말로 하지 못하는 정다움이 생김을. 강한 말에 강한 말이 돌아오며 저마다 팽팽한 감정선을 내보인다. 조마조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래에 앉은 말수 적은 노부부다. 언제나처럼 말없이 앉았다. 재지도 그렇다고 움츠리지도 않는 이들이다.
제 부모와 얼굴도 맞대지 않고 올라선 먼당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발아래 배롱나무도 살핀다. 베는 둥 마는 둥 치고 간 잡초들은 그사이 말라 붙었지만, 모양은 여전하다.
"밭에 있던 나무를 캐와서 하나하나 땅 파서 심었는데"
"서너 해 자라서 이제 제법 큰 나무를 도대체 누가 그랬을까?"
"나무가 다 타서 벌초할 힘도 안 나더라!"
다 죽었다는 배롱나무를 자세히 보다가 새 이파리를 발견한다. 왁자하니 떠든다. 가지가 완전히 타서 버석거리는 두 그루도 땅에 선 몸체에서 붉은 잎눈이 나고 있다.
"내년 봄에는 살아나지 않겠나, 살아날 것이다."
나 들으라는 듯이 외는 그네들의 기운이 눈부시다. 빗물을 모아 겨우 살려낸 것을 알기나 할까. 지난해 가지가 마를 때도 힘들었다. 엉거주춤 기어 올라오던 노인은 지금 올라오는 4명의 동선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며 두리번거리며 올라왔다. 가슴팍에서 뭔가를 꺼내 가지에 갖다 댈 때도 불을 뿜을 줄은 몰랐다. 사람만 무서웠는가. 둘러선 나무 땅 하늘이 보고 있는데 애꿎은 나뭇가지를 태웠다. 그을린 목신이 내려가는 엉덩이를 둘러차 엎어지고 자빠지며 갈 때는 또 올 줄 몰랐다. 올여름 그 노인은 또 나타났다. 지금 넷이 선 자리를 비켜 가며 잽싸게 나무들을 태울 때 말 못 하는 자들은 그저 바라만 봤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흐르고 숱한 날 비가 온 뒤에 주인이 왔다. 산허리를 팔았으면서 임자 짓을 하는 영감을 알아챈다. 뿌리 건사하느라 애가 탔던 지신이 온화한 눈으로 바라본다.
과일 몇을 놓고 술을 붓는다. 둘레둘레 늘어선 모양이 세상에 나온 차례인가 보다. 술을 붓고 절을 하는 양을 노부부가 바라본다. 오랜만에 그들의 어깨가 반듯하다. 찾아온 손님들은 부어놓은 술 탓인지 이제 막 나오려는 햇살 탓인지 말씨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치고받을 듯하던 기세도, 탓하고 원망하던 마음도 누그러졌다. 오가는 말을 자세히 들어 보려고 귀를 세우는데 누군가 향을 꺼버렸다. 향 따라오던 말이 전해지지 않아도 넷의 행동이며 눈빛을 보는 산신은 즐거워한다.
내려가는 뒷모습을 본다. 너무 늦지 않게 와서 아직 남은 잎을 보고 가서 다행이다. 배롱나무 잎까지 다 지고 난 다음에 왔더라면 애써 살려둔 기색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나무에 분탕질을 한 영감에 대한 분노도 삭이고 웃음도 찾아서 간다. 한 잔 부어놓은 술잔에 제각기 마음도 담았던가. 무얼 전해 들었는지 노부부도 잔잔한 표정이다. 제 부모를 부탁한다는 주문도 얼핏 실려왔다. 꼭대기에 터 잡고 앉았을 뿐 수억만 년 전에 먼저 온 나를 알고 하는 부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