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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딸기 한 주먹

5.

by 사과꽃


푸른 나무 사이로 맨살 맨흙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색 황토로 유명하다는 산은 아직 여름도 오기 전에 나뭇잎에 묻혔다. 그 시퍼런 이파리 사이로 웬 처자가 얼굴을 내민다. 산 꼭대기를 향하는 얼굴이 하얗게 반짝여서 알았다. 자세히 보니 손을 덜덜 떤다. 쿵쾅쿵쾅 심장 뛰는 소리도 들린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를 애써 삼킨다.


"그래가지고 이 산에 어찌 들어왔누?"


발 앞에 놓인 제 키만 한 풀을 제쳐주고 싶다. 잡초로 뒤 덮여 땅도 드러나지 않는 길을 한 발 한 발 밟아 오는 게 안쓰럽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뭐라고 한다. 엄마 아버지라고 부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아래에 앉은 노부부 입이 귀에 걸렸다. 날아온 것도 아닐 텐데 기척도 없이 예까지 올라오다니.


언젠가 포클레인 기사가 와서 길을 내던 곳을 따라온다. 이 집 저 집 땅을 이어주는 길을 내서 시원했는데 어인 일인지 다른 날에 와서는 그 길을 허물었다. 이제 그 터도 잡초가 다 덮어 길이었는지 분간이 안된다. 엎어질 듯 통곡하듯 발을 떼온다. 무서움을 이긴 감정이 주위에 열기를 뿜는다. 그럼에도 잡신들은 가만 두지 않는다.


"어떻게 왔어? 왜 빈손이야?"


둘러싸서 머리를 만지는 놈, 손을 건드는 놈, 주위를 뱅글뱅글 날아 도는 놈들 천지다. 그 잡신들을 쫒은 건 언제나처럼 몸이 가벼운 자신(子神)이다. 방금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사이 쫓아나가 있다. 지신 토신 목신들은 인자하게 바라본다. 굳어있던 처자가 제 편을 들어주며 호위하는 꼬맹이 신을 알아챘을까. 바로 서서 숨을 한 번 몰아쉰다. 발걸음에 힘을 실는다. 잡신들이 멀찍이 나가떨어진다.


흙이 무너져 내리는 산비탈에 산딸기나무가 많다. 그렇지 않아도 비탈인데 이리저리 뻗은 산딸기 가시 때문에 지나가기가 쉽지 않다. 미끄러질세라 찔릴세라 간신히 건너온다. 이 깊은 산에 여기에 산딸기나무가 있었던가. 지난겨울에 흔적도 없던 가시덩굴이 어느 틈에 이렇게 자랐단 말인가.


"어라 정말 빈 손으로 왔어?"


잡신들이 삐죽거리며 돌아설 때 저도 빈손으로 온 걸 알아챘는지 갑자기 처자가 두 손으로 산딸기를 따기 시작했다. 손을 뻗을 수 없는 곳에는 굵고 실한 딸기가 조랑조랑 달렸지만 거기까지 손을 뻗을 용기가 없다. 쿵쾅거리는 가슴이 들킬 것 같고 움직임조차 불편하다. 어깨가 자꾸 움츠려 든다. 눈앞의 딸기만 따도 순식간에 두 주먹이 됐다. 가장 높은 지대에 올라섰다. 두 봉분 사이 돌 판 위에 산딸기를 놓는다.


"이거라도! 그냥 와서"


그래놓고 아무 말이 없다. 한 여름인데 입이 얼어붙는다. 주위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좌측에는 반듯한 돌 패가 열을 맞춰서 산 아래까지 누워있다. 우측에는 산딸기나무 뒤로 시커먼 나무가 둘러섰다. 그 나무 사이로 둥글둥글한 봉분이 시선마다 보인다. 왼쪽도 오른쪽도 고개 돌리지 못한다. 하늘 한 번 보고 그 아래 나무능선을 따라 굽어보다가 다시 양 볼이 서늘해졌다.




한 낮인데도 적막한 산속 공기가 도리어 가슴에 방망이 질 한다. 무슨 정신으로 올라왔는지 퍼뜩 지대를 깨달았다. 내려갈 길도 보이지 않고 누가 뒤에 있는 듯한 느낌은 목을 더 움츠리게 한다. 태연한 척 마음을 다잡으며 걸음을 뗀다. 돌아보지도 못하고 속으로 되뇐다.


"오랜만에 오면서 빈손이라 미안합니다."


더 말하고 싶어도 벌써 발이 아래로 향했다. 노부부가 안쓰럽게 바라본다. 둥둥거리는 가슴을 안고 돌아서는 모습에 손을 흔든다. 두둥두둥 발을 떼며 비탈길을 내려왔는데 엎어지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넘어지려 할 때마다 자신(子神)이 받쳐주고 당겨주었음을 알턱이 없다.


말도 못 하고 간다. 일러줄 게 있었던가? 물어볼 게 있었던가? 해야만 했던 말이 있었던 건가? 그 마음을 다 알아줄까. 산은 조용했고 차분했고 변함이 없었고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홀로는 오지 말라고 더 늦게는 오면 안 된다고 한 것 같다. 평지에 내려서고야 마른눈에 물기가 핑 돈다. 호된 경험을 치렀지만 그득해진 어깨로 산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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