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수능 샤프는 노란색
주옥같은 하루가 대충 끝났다. 새벽 출근을 하다 풀악셀로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차에 치일 뻔했다. 그래도 목숨을 건져 무사히 감독까지 마쳤다. 백미러를 향해 살포시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준 것까진 나쁘지 않았다. 1, 2, 4교시 감독이 된 게 좀 나빴지. 아니다, 사실 예비 감독 2번이던 내가 종사관이 되었다고 했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5교시 감독은 아니라 행운인가? 감독 수당을 현금으로 받았고 퇴근 길에 로또를 샀다. 아이들이 입시에서 행운을 노릴 때, 교사는 5천원으로 희망을 산다.
전자기기를 전부 반납한 탈속의 상태로 시험장이라는 세속에 좀 쑤시게 박혀 있었다. 내신 시험 감독 때는 머릿속으로 추리 소설을 5편쯤 쓰고 사람을 30명쯤 죽이면 한 교시가 흘러가는데, 수능은 과목 당 시간이 워낙 길다 보니까 혼신의 힘을 다해 시간을 죽이지 않으면 감독이 죽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애니메이션 캔디 주제가를 무한 반복했다. 왜 캔디였는진 나도 모르겠다. 신내림 받듯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하는 가락이 뇌리를 스쳤달까.
신분증의 아이들은 뽀얗게 화장을 해서 연예인 같은데, 수험표와 시험장의 아이들은 무언가 영혼이 나간 것 같아 보인다. 얘네랑 같이 있다 보니 굳세어라 하는 마음에서 캔디가 흘러나온 걸지도 모른다.
두 번째 수능이었나, 마지막 수능이었나, n수생이던 시절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와 가채점을 하고는 세상 서럽게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웃으면서 친구와 통화를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울음이 웃음을 완전히 이겨버리더라. 그래서 전화를 끊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도록 울었다. 나와 연락이 닿질 않자 불안했던 친구는 우리 집으로 피자를 시켰다. 혹시나 내가 죽었을까봐 그렇게라도 생사 확인을 시도한 게 지금 생각하면 웃기고 귀엽고 고맙다.
입시란 게 참 하잘 데 없는데, 왜 19살까진 입시에 목매게 만드는지. 그게 뭐라고 사람의 자존감을 다 앗아가는지 야속하기만 하다. 지나고 보니까 학력은 알량하기 짝이 없고, 삶은 성적표 밖에 있더라. 이런 말을 아이들에게 해봐야 소용도 없다. 온 사회가 다 같이 “공부해라, 좋은 대학가라”라고 말하는 판에, 대학 졸업한 지 오래인 인간이 그거 별 거 없다고 해봐야 들리기나 할까.
그럼에도 말을 얹는다면, 글쎄 일단 다 잊고 맛있는 거 먹으려무나. 비행기조차 이착륙을 하지 않고 허공을 맴돌며 너의 무운을 빌어줄 날은 앞으로 또 없을 테다. 네가 어떤 아이든 어떤 결과를 가져왔든 그 시간 동안 세상이 너를 향해 보여준 배려만큼은 진짜였으니까 온전히 누리렴. 안도든 실망이든 해방이든 무력감이든 너를 찾아오는 그 어떤 감정도 앞으로의 삶을 망칠 힘은 없단다. 믿지 않아도 괜찮아. 인생 끝난 듯한 절망을 느끼며 눈물 젖은 피자를 먹던 쭈구리가 그 뒤로도 대충 살아지는 대로 살다가 수능 감독관 업무를 끝내고 집에 와서 하는 아무 말일 뿐이야.
10살, 나는 내가 세상을 바꿀 위대한 어른이 되리라 믿었다. 그럼 뭐 하나? 그 어느 날 시험을 잘 봤든 못 봤든 어차피 위대는커녕 복권 1등을 노리며 한 주의 희망을 구매하는 소시민이 되었을 텐데. 그래서 인생을 망쳤냐 물으면 미쳤냐고 반문할 거다. 기회를 놓치더라도, 손 쓸 수 없이 다 망친 것 같아도 인생은 생각보다 평범하게 수습되고 금방 아무 일도 없는 일상이 반복된다. 어쩔 땐 이런 점이 참 위안을 준다.
아 내일도 1교시 수업이다. 인간적으로 수능 다음 날은 공휴일로 지정해줬으면 한다. 학생도 어른도 모두 고생한 하루가 끝났으니 당분간은 안온한 밤을 누리길. 근미래엔 4차 산업혁명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도록 AI가 시험 감독으로 들어가길. 인간이 돌처럼 가만히 감독만 하자니 삭신이 쑤셔서 원….
ps.
처음 수능 감독을 맡았을 때 가장 놀란 점 : 시험을 치다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다. 분명 예전에는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갔던 것 같은데, 이제는 배변(?)의 자유를 보장해 준다. 역시.. 인권에 대한 인식은 진보하는 걸까? 아니…다른 시험은 못 그러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