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육공 Jan 08. 2024

피규어와 엄마


   나에게 주는 생일 선물로 피규어를 샀다. 아무도 나의 취향을 이해해주지 않았지만 의외의 인물이 너무 예쁘다며 비명을 지른다. 엄마다. 동생도, 친구도, 직장 동료도 어디가 예쁜지 모르겠다던 피규어를 우리 엄마가 좋아한다. 내 눈에만 예쁘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내심 서운했는지 호들갑 떠는 엄마를 보자 괜히 신이 난다.


 “이런 건 어디서 사?” 엄마가 물었다. 생각해 보니 근처에 오프라인 매장이 있다고 언제 한 번 같이 가자니까

“엄마랑 꼭 가자 너무 예쁘다!” 라며 눈을 빛낸다. 에라 모르겠다. 맨 왼쪽 피규어를 엄마에게 선물하고 지금 당장 같이 가자고 이야기했다. 엄마랑 연초부터 피규어 매장을 돌게 될 줄은 몰랐다. 결과적으로 엄마는 랜덤 뽑기 황금손이었고, 본인이 갖고 싶어 했던 아이를 한 방에 뽑았으며, (은하수 머리를 한 꼬마 요정 피규어) 내게도 피규어를 세 개나 투척해 주었다.


  엄마가 내 피규어를 예쁘다고 말해줄 때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지, 나이가 들어도 피규어가 예뻐 보일 수 있지'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왜 당연히 엄마가 피규어를 안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우리 엄마는 아직도 안 해본 게 많구나. 여전히 아이같이 기뻐할 수 있구나. 왜인지 죄책감마저 든다. 만으로 서른 하나가 된 딸과 오십 대인 엄마는 이제부터 의외의 취미를 공유하게 되었다. 새로운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팝마트에 같이 가야지. 물건을 사자마자 뜯으러 가자고, 계단에 앉아서 같이 피규어를 뜯은 그 몇 분이 길이 남을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오히려 나이가 든 이후에 나도 엄마도 순해지고 여유가 생겼다. 이전처럼 소리치거나 서로를 헐뜯거나 하지 않고 즐거움을 나누려 노력한다. 귀여운 인형을 보며 까르르하는 모녀, 시간이 지날수록 꽤 괜찮은 울림이 된다.


  돌아가는 길에 엄마 몰래 피규어를 세 개 더 주문했다. 두 개는 내 거, 하나는 엄마 거. 갖고 싶어 하셨는데 매장에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아 못 샀던 시리즈다. 엄마한테 골라서 뜯게 할지, 미리 뜯어서 엄마 취향인 아이를 찾아줄지 고민이다. 또 엄마가 안 해본 게 뭐가 있을까? 돈을 모아 휴양지로 해외여행을 가야겠다. 또 뭐가 있지, 같이 록 페스티벌에 가는 것도 좋겠다. 대신 좀 쉬엄쉬엄 놀 수 있는 페스티벌로... 아무래도 펜타포트나 부산 락페는 좀 빡셀 것 같다. 아직도 엄마랑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이 많이 남았다니 인생이야 말로 랜덤 피규어 뽑기일지도 모른다. 이전까지는 꽝이 더 많은 삶이었으니, 이제 엄마와 나 사이엔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더 많으리라 믿는다. 그냥 별 것 아닌 일로도 설렘이 차올라서, 그게 참 기분이 좋아서 글로써 남겨 본다.

이전 01화 건방지게 컸어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