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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육공 May 17. 2024

건방지게 컸어요

  최근에 상사에게서 '너 참 사납다'라는 말을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납게 행동한 적은 없다. 으르렁거리며 사람을 물지도 않았고 헛짖음이 있던 적도 없다. 그저 일과 관련 없는 인신공격을 하시길래(자세하게 풀면 직장 내 갑질로 고소하라는 댓글이 달릴 것 같으니 일단은 쓰지 않겠다) 공적이지 않은 말은 삼가 달라고 부탁드렸을 뿐이다. 바른말을 좀 했다고 사나운 사람이 되다니 신기할 노릇이다. 내가 조금 건방지다는 점은 인정한다. 말버릇이 '못하는 게 별로 없어요', '잘하는 게 오천 개, 못하는 건 겸손하기 정도?'이다. 농담 삼아하는 말이지만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이런 말을 일삼는데도 주변에 날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게 나의 매력이다. 다들 그렇게 내게 감겼다. 요즘은 좀 겸손하려고 노력한다. 언제까지고 애처럼 굴 수는 없으니까.


  지난번엔 상담 선생님이 놀라워하며 '어떻게 부조리에 그렇게 대응할 수 있어요?'라고 물으셨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저 못 잘라요. 제가 담당한 일이 좀 많아요.'라고 했더니 '그 일은 어렵지 않으세요?'란다. 솔직히 일이 어렵지는 않다. 사람이 스트레스지. 그랬더니 유경씨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거냐고 반문하신다. 생각해 본 적 없다. 잘하는 사람들 모두가 당신처럼 당당하게 굴진 못한다는 말을 곁들이신다. 그러니 분명 유경씨가 당당할 수 있도록 만든 요인이 있을 거란다.


  "절대적인 지지와 애정을 받은 적 있나요?"


  결국 이걸 묻고 싶으셨나 보다. 아무래도 상담실에서는 불행을 더 많이 이야기하니까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이번 글의 본론도 이제 시작된다. 저 한 문장을 묻기 위해 빙빙 돌아 질문한 상담선생님처럼 긴 서론이었다. 내게는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다슬기 삶은 것과 마른 오징어, 붕어찜과 소주를 좋아하던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건 나였다. 정말인지 할아버지가 단 한 번이라도 내게 인상을 쓴 기억이 없다. 항상 웃는 얼굴로 내 손을 잡고 냇가와 산을 다니시던 모습만 기억난다. 빨간 꽃무늬 수영복을 입은 나의 튜브를 밀어주는가 하면, 매년 봄에 같이 진달래를 따 먹으러 다니고, 가위바위보나무의 나뭇잎을 뜯으며 내기를 했다. (가위바위보 나무가 실제로 어떤 나무인지는 모른다. 그저 잎이 7개인가 정갈하게 나있어서 가위바위보를 하며 하나씩 뜯었기 때문에 가위바위보 나무라고 불렀을 뿐이다.) 할아버지의 차 안에서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울자, 그냥 편히 차에 실례하라고 웃으며 말해주셨던 기억도 난다. 그 차는 할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냥 그 차보다 나를 더 아꼈다. 집안에 동생들이 줄줄이 태어나도 할아버지의 첫 번째는 나였다. 나는 할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딸의 첫 딸이었으니까. 너무 빨리 돌아가셨다. 고작 내가 열 살 때 돌아가셨으니, 요즘으로 치면 참 정정할 나이에 떠나셨다.


  그때의 나는 늘 사랑이 고팠다. 할아버지는 꿈에도 몰랐겠지만 우리 집에서 나는 천덕꾸러기였고, 냉대와 학대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맞지 않아도, 혼나지 않아도, 모자라다고 욕을 먹지 않아도 되는 곳은 오직 할아버지의 품 속에서였다. 동생이 태어났어도 내가 우선일 수 있는 유일한 자리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너무 오래 잊고 지냈다. 그래서 난 할아버지 집에 가는 걸 참 좋아했다. 그곳에 가면 앵두나무도 있고, 뒷산에서 아까시나무 꿀도 딸 수 있었으며, 내게 좀 짓궂었으나 첫 조카라고 너무도 예뻐하며 나를 둥기둥기 안고 다니던 삼촌들과 숙모들도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방문할 즈음 직접 식혜를 만들고 누룽지를 눌러두셨다.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나는 외가外家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곳이 내게는 삶의 안쪽內이었는데, 어떻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외'숙모가 될 수 있겠는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바로 팔아버린 그 이층 주택을 아직도 기억한다. 아담했던 정원과 공터, 거실 천장의 무섭게 생긴 나무 무늬와 부엌의 강아지 같던 그을음 자국까지도 잊을 수 없다. 작은 방에선 작은 삼촌이 내 대신 어려운 게임들을 깨 주었다. 큰삼촌과 큰숙모는 엄마와 아빠 대신 유치원 방문의 날과 학교 졸업식에 찾아와 주었다. 지금도 불쑥 숙모와 삼촌을 찾아간다. 그러면 아무렇지 않게 반겨주고 가장 비싼 차를 내어준다. 우리 할머니는 80이 넘은 나이로 날 위해 누룽지를 만드신다. 두어 달에 한 번 거의 한 박스가 되는 직접 만든 누룽지를 받아 볼 때 이가 나가버릴 것 같은 사랑을 느낀다. 마냥 불행했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에도, 나를 버티게 했던, 나를 이유 없이 사랑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아직도 삼사 년에 한 번씩은 할아버지 꿈을 꾼다. 주로 견디기 힘들 만큼의 사건이 터졌을 때나 큰 일을 앞두고 있을 때에만 꿈에 할아버지가 나온다. 최근의 꿈에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가 울면서 내 손을 꼭 잡고 그런 험한 길은 가지 말라고 온 마음을 담아 이야기해 주었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니까 과학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간 스트레스로 억눌린 마음이 그렇게 분출된 걸 수도 있다. 그래도 기왕이면, 죽어서도 보고 싶은 손녀가 힘들어하는 게 눈에 밟혀 찾아온 거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스러운 손녀가 어느덧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모습이 애달프도록 마음 쓰여 눈물 흘리신 거라고 그렇게 믿으려 한다.


  사람들은 행복과 불행 중 불행을 더 진하게 기억한다. 아무래도 행복은 불행의 부재라서일까? 다른 글에서도 썼었지만, 365일 24시간 불행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잠시 잊었을 뿐, 분명 누군가에게 사랑받은 흔적은 어디에라도 남아있을 거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글로써 당신을 사랑하겠다. 다정은 나의 습이요 목표요 이상이니 말이다. 할아버지를 닮아 다슬기와 마른오징어를 좋아하는 나는, 그때 받았던 무한한 애정과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조금 건방진 애어른이 되었다. 나의 당당함과 자신감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숙모와 삼촌들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흠 글쎄, 조금 더 건방지고 당당해도 괜찮지 않을까? 모두의 사랑 덕에 이렇게 건방지게 잘 컸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왠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동안 받은 너무 많은 사랑이 그만 전부 담기지 못하고 눈밖으로 넘쳐흐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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