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마누 Feb 05. 2024

새, 오정희 장편소설

사랑과 책임

젊고 예쁜 엄마는 자꾸 집을 나갔다. 안방에는 커튼으로 가려진 벽장이 있었는데 가운데 이불속에 손을 쭉 넣으면 엄마의 장지갑이 있었다. 학교 갔다 와서 엄마가 없으면 나는 이불속에 손을 집어넣고 지갑을 찾았다. 지갑이 없으면 오랫동안 엄마가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가 집을 나가고 며칠 있다 아빠도 사라졌다. 매번 "이놈의 지집년들"이라고 욕하던 할머니는 아무 말없이 밥상을 차렸고, 할아버지는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연기가 나지 않는 담배를 피웠다. 나는 작고 어두운 할머니방에서 이불을 쓰고 잠이 들었다.


아빠는 언제나 엄마와 함께 돌아왔다. 둘은 맛있는 것도 먹고, 사진도 찍고 왔다. 새 옷을 입고 들어올 때도 있었다. 나는 매일 학교에 가면서 엄마가 집에 있기를 빌었다. 엄마말을 안 들으면 나 때문에 집을 나가면 안 되니까 엄마가 하라는 것만 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나도 안 했다.


시간이 지나 거미처럼 말라가는 엄마를 보면서 차라리 엄마가 집을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밥도 혼자 잘 챙겨 먹고 동생들도 알아서 옷도 잘 입고 있으니 술 마시면 괴물이 되는 아빠한테서 엄마가 도망을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거센 아빠의 폭력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그저 견디고 있었다. 나보다 작은 엄마가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아빠에게 매를 맞아본 적이 없다. 오정희의 소설 <새>를 읽으며, 국민학교를 다녔던 그때가 생각났다.



소설창작시간에 교수님은 오정희의 단편소설 <저녁의 게임>을 예로 들면 소설의 처음을 이렇게 써 봐라. 하셨다. 그때 처음 오정희작가를 알았다. <저녁의 게임>을 읽으며 말하고 싶은 것을 어떻게 돌려 말하는지 배웠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설을 읽을 때 좀 더 집중하며 읽게 됐다.



<저녁의 게임>을 읽은 후,  오정희장편소설 <새>를 읽었다. 작가의 다른 소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새>는 읽으면서, 읽고 나서 마음이 아픈 소설이다.  마치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듯한 우미와 우일이의 이야기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국민학교 5학년 우미와 3학년 우일이는 엄마가 집을 나가자 외할머니댁과 외삼촌의 집을 거쳐 큰집에 맡겨진다. 아빠는 밖에서 돈을 벌고 있다. 우미와 우일이는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언제나 천덕꾸러기 신세다.


어린아이들에게 엄마는 무엇일까? 세상에 오롯이 나만을 사랑해 주는 단 하나의 사람. 엄마가 없으면 맛난 밥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다. 아이들은 스스로 소리를 내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깨우친다. 아이 닮지 않게 아이들이 커간다.



아이들은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으며 그래도 큰다. 속이 텅 비어야 하늘을 날 수 있는 새처럼. 아이들의 마음은 점점 굳어진다. 어른들의 이기심과 욕망 속에서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우주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되라고 우미라고 이름 짓고 우주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되라고 우일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우주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들.



사랑한다는 말을 하며 새를 새장 속에 집어넣듯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새장 속에 갇힌 채 잊힌다. 새장 속에 넣었으니 안전하겠지 생각하고 외면한다. 우미와 우일은 세상에 존재하지만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 안아이 들이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아이들은 스스로를 지키고 견디는 법을 배운다. 5학년 우미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계는 알 수 없고, 부끄러우며, 쓸쓸하다. 우미가 생각하는 것들, 우미가 말하는 것들은 담담하고 기대치가 없다. 우미에게는 어린 시절 몸은 작은데 머릿속에는 어른 몇 명이 살았던 13살의 내가 있었다.



아이들이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아이들은 다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그게 뭔지 정확히  몰라서 표현할 방법이 없을 뿐이다. 알고 있지만 아직 힘이 없어서 하지 못할 뿐이다. 아이들은 다 기억해 두었다가 하나둘씩 꺼내거나 속 어딘가에 깊이 묻어둔다.




오정희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불우한 환경에 처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자원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경험이 동기가 되어 쓰였다."라고 말한다. 아마 작품 속의 '상담 어머니'가 작가 자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상담어머니는 진짜 어머니가 될 수 없었고, 선의로 내밀었던 손은 거절당한다.



상처 입은 아이들은 더 잘 알고 작은 것에도 예민한 걸. 책을 덮으며 마음이 아팠다. 날이 흐려서인가.

이전 09화 카탈로니아 찬가, 조지 오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