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사상으로 변화한다
불활동(不活動)은 즉 비겁이다. 그러나 학자치고 용맹심이 없는 사람이 없다. 사장의 전제(前提), 사상이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통하는 과정, 이것이 활동이다. 나는 다만 내가 살아온 한도의 것만을 알고 있다. 한편 우리는 누구의 말에 생명이 들어 있고, 누구의 말은 그렇지 않은가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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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역, 재난, 분격, 궁핍은 웅변과 지혜를 주는 교사이다. 참된 학자는 모든 활동의 기회가 지나가는 것을 힘의 손실처럼 아낀다. 그것은 지력(智力)으로써 그 찬연한 결과를 주조해 낼 수 있는 원료이다. 또한 경험이 사상으로 변화되는 과정, 이것은 기이한 것이어서 마치 뽕잎이 비단으로 변화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 제조는 어느 때에나 진행된다. (에머슨 수상록 중 P.148-P.149)
사상의 전제(前提)
사상 : 어떠한 사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고나 생각
전제(前提) :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을 이루기 위하여 먼저 내세우는 것
사상의 전제가 활동이다. 어떠한 사물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거나 사고하기 위해서는 활동이 필요하다. 불활동은 비겁이다. 행동하지 않고 책만 읽으면 안 된다. 나의 경험(고난과 재난, 궁핍)은 사상을 위해 필요하다. 경험이 사상으로 변화한다.
나는 사상을 책으로 배우는 건 줄 알았다. 책에서 배운 것을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책을 읽기만 했을 뿐 실천하지 않는다고 자책했다. 그런데 애머슨은 사상의 전제가 경험이라고 한다. 경험이 사상으로 변화된다고 한다. 슈퍼거북맘님은 자신이 경험주의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글쓰는 트레이너님도 경험주의다.
그들의 공통점은 생각보다 행동이 빠르다는 것이다.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보며 구별하는 사람이다. 먹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을 굳이 먹어서 깨우치는 사람이다. 몸으로 익힌 것은 오래간다. 각인된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경험은 구체적이다.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묘사가 가능하다.
반면 나는 이상주의자다. 책에서 사상을 배웠다. 책을 읽고 알게 됐다고 착각하며 책을 덮었다. 그럴 듯한 글을 쓰지만 실체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척 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 말이 장황하고 수식이 많다. 읽을 때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서면 흩어진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뭘 하며 살아온 것일까?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이 유일한 나의 자부심이었는데, 파도 몇 번에 허물어지는 모래성을 쌓으면서 만족하고 있었다.
무너지는 것을 지켜본다. 아프게 본다. 하지만 고통스럽거나 좌절하지는 않는다. 나를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책을 읽었는지 분명하게 알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게 알았다. 안다는 것은 장점과 단점을 모두 파악했다는 말이다. 이제부터 장점은 놔두고 단점을 고쳐나갈 예정이다.
좋은 건 놔눠도 된다.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좋은 건 좋은 거다. 부족한 것을 놔두면 점점 구멍이 더 커진다. 지금은 부족한 정신의 바구니를 키울 시간이다. 경험이 사상으로 변화되는 것은 뽕잎이 비단으로 변하는 것처럼 경이롭다. 경험을 토대로 나만의 사상을 만든다.
5월 11일 일요일 8시에 지담작가님의 유튜브라이브 스트리밍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모든 경험은 의미가 있나요?라는 질문에 지담작가님은 경험을 삶이라고 했다. 모든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다. 의미가 없구나 하는 의미를 갖게 된다. 같은 상황 속에서도 다른 판단을 하는 것은 나의 정신적인 크기에 달려 있다. 내 정신을 키워서 내가 가보지 않은 넓은 공간을 꿈꿀 수 있게 만들어라. 나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경험은 의미가 있다.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을 구별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결과가 증명한다. 인생은 간단한데 우리가 복잡하게 사는 것이다. 의식주를 해결하고 정신의 힘을 키워라.
하고 싶은 것은 권리다. 자고 싶어서 잔다. 읽고 싶어서 읽는 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반면 해야 하니까는 의무다. 공부해야 하니까 공부한다. 책을 읽어야 하니까 읽는다.
사람은 태이고 싶어서 태어나지 않았다. 태어나야 하니까 태어난 것이다. 죽고 싶어서 죽는 게 아니라 죽어야 하니까 죽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목숨값, 사명이 있다. 산다는 것은 내 꼴을 치러야 할 몫이 있다. 그것이 의무다. 그걸 하는 것이 경험이다. 삶 전체가 의무다.
의무는 일보다 큰 의미다. 갓난아이에게는 잘 먹고 잘 잘 의무가 있다. 아이는 공부하고, 잘 놀아야 하는 의무가 있고, 나이가 들면서 의무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의무와 권리는 연속성으로 온다. 갓난아이 때 잘 먹고 잘 자면 어린이집 적응을 쉽게 한다. 의무와 권리는 같이 존재한다. 의무가 먼저고 권리가 나중이다.
의미를 부여한다.
경험에 의미를 부여한다
가치를 부여한다
가치를 느꼈을 때 궁극의 쾌락이 온다
엄마의 인식 안에는 아이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좋은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어떤 경험도 도움이 안 되는 것이 없다. 허용적 육아(사랑과 희생으로 키우는)로 키운 아이들이 가장 어리석게 자란다. 시련과 고통도 의미가 있다. 세상이 부여하는 것이다.
나는 권리를 누리면서 의무를 다하는 척 살았다. 냄새만 맡아봐도 똥인지 된장인지 알 텐데 멀리서 보고 섣부르게 결론지었다. 머리로 생각하고 단정 짓고 살기 때문에 항상 머리가 아프고 꿈자리가 사납니다. 경험과 인식은 겁을 낸다. 그러나 내가 할 일은 의무다. 미리 겁먹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냥 쓰다 보면 세상이 자격을 줄 것이다. 만일 자격미달이면 계속 쓰고 또 쓴다. 나를 믿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나는 소설가 레마누다. 전체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1%의 가능성을 따라간다. 나의 경험을 나만의 사상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