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죽음에 관하여.
인류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필자는 죽음에 관하여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다. 그러나, 현재 2021년, 중 환자실에서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를 간병하며 상주하는 동안, 별세하는 어르신들을 눈앞에서 보고 많은 생각이 든다. 또한,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병마와 싸우고 있는 것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에게는 두발로 걷는 것, 자신의 손으로 밥을 먹는 것이 소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건강한 신체를 가진 지금의 내가 얼마나 행복하는 것인지를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이후 저자의 삶에 대한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최우선은 건강이다. 물론, 본인이 아무리 건강 관리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오래 산다는 말도 아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위험 속에 노출되어 살아간다. 예를 들어, "나"는 신호를 잘 지키는 보행자, 운전자가 되더라도, 제3의 누군가가 교통법을 위반하여, 한 순간에 신체 중 한 부분이 불구가 되거나, 즉사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이와 같은 사례는 정말 많다. 삶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내가 항상 조심은 하더라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나를 절망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 가끔씩, TV에서 저명한 연예인, 사업가들이 젊은 나이로 병사하거나,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는 것을 접한다. 부자라고 오래 산다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이다. 그러나, 질병은 최소한 예방이라도 할 수 있고, 예방이 최고의 대책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평균수명이 길어짐에 따라 질병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을 명심 하자. 인간의 신체 수명은 70~80살이다. 그러나, 현재 100세 시대를 이미 돌파했다. 현세대는 최소 30년은 질병과 공존할 것이다. 뇌경색, 치매, 고혈압, 당뇨병 등 이런 병들이 노화로 인해 올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다. 우선, 질병에 대한 태도부터 바꿔야 한다. 저자의 할머니를 비롯해서 많은 어르신들이, 풍에 걸린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을 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노화로 오는 질병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태도의 전환과 더불어 예방을 평생의 과제로 삼어야 할 것이다. 뇌사상태 환자에 관하여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의사의 선언 중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마라"와 "윤리적 문제"로 인해, 과거에는 환자의 목숨을 연장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저자의 개인적 지론은 '인간은 인간의 존엄성을 잃었을 때가 진정으로 죽었다' 라 생각한다. 현실적 문제와 윤리적 가치관의 딜레마다. 예를 들어, 뇌사한 사람의 살 권리는 누가 부여할 것인가? 인도적 차원에서는 살리는 것이 맞다.
그러나, 튜브 삽입과, 치료의 고통은 환자 본인의 몫이며, 그의 선택은 존중되었는가?
환자는 고통이 동반되는 삶의 연장을 원하는가? 치료비, 간병인 등 비용 부담은 누가 해야 맞는가?
간병은 도의적으로 자식들이 하는 게 맞는 것인가?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는 말이다. 이런 문제는 한순간에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는 미리 현실적으로 현명한 죽음에 관하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많이들 착각하는 부분이 있는데, 노인은 일반 성인과, 유아와 전혀 다르다. 노인이 먹는 약이 두 알 이상이면, 노인 전문의사, 약사와 상담을 해야 하며, 고령 노인의 수술이 오히려 삶의 질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도 명심 하자. 개인적으로, 수족을 다 못 쓰시는 할머니를 간병해보니, 체력적, 정신적으로 정말 힘들다. 기저귀 교체, 침상에서 휠체어로 옮기는 것까지 이런 기본적인 일도 남자인 나조차도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단편적으로, 노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자식이 하면 환자 입장에서는 정신적으로 많은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현시대 대부분의 가정은 외벌이가 아닌 맞벌이다. 누군가는 본업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외에도 누가 간병을 할 것이며,부터 시작해서 많은 문제들이 있다. 외부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간병하는 가족의 삶은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간병인을 고용하면, 간병인 관리부터 또 다른 방면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문화 차이 인지, 세대 차이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자는 요양원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해외에서도, 노부모들은 보통 실버타운으로 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데, 저자의 할머니는 요양원을 감옥으로 받아들이셔서 많이 놀랐다. 끝으로, 죽음에 관하여 동떨어진 주제라 생각하지 말고, 탄생의 기쁨은 형용할 수 없는 축복이지만,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지혜롭고 아름다운 죽음 또한 고려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