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 25.02.03
"춤은 혼과 몸을 통해 표현하는 예술의 한 종류이다." [^1]
"미적 정서를 리듬에 맞춰 신체로 표현"한다고도 말하는데, 반복되는 것을 수월히 인식하는 인간의 행태가 리듬에 의미를 부여한다. 아름다움은 맥락적으로 해석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춤도 문화에서 떨어트려 생각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다른 사회로 수이 전파되기도 하고, 밀림 원시 부족의 춤에선 원초적인 생명력의 감동을 공감하는 문화권이 많다. 그런 걸 보면 뇌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신체 부위로 정서를 표현하는 건, 문화의 맥락을 뛰어넘는 어떤 것. 인간 공통의 표현이 섞여 들어가기 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인 몸짓의 변주와 반복, 표현을 통해 보여주는 독무(solo dance)와, 약간의 단순화를 하는 대신 수의 반복을 통한 대칭과 비대칭으로 변주의 폭을 확장해 내는 군무(group dance)와는 다르게 partner dance는 묘한 밸런스를 갖추고 있다. 각자가 개인으로서 표현하는 것에도 충분히 무게를 두고, 함께여서 만들어지는 표현의 확장에도 관심을 둔다. 2라는 숫자가 충분한 반복이라고 느껴지지는 않기 때문에 [^2] 반복의 느낌을 강조하기보다 조화나 확장을 가져오는 것에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있다.
반드시는 아니지만 partner dance에는 리더, 팔로워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둘이 동기화된 움직임을 보이기 위해선 분절된 동작에 앞서 신호를 주고받는 것이 낫기 때문이리라. 능숙한 이 가 리딩역할을 통해 전체의 완급을 조절하는 것은 다양한 팀워크의 일상적 형태다. 자세한 분류는 할 지식도 못되지만 춤에 따라서는 리딩 역할이 고정적으로 정해지는 경우도 있다. 문화적 사회적 요소가 춤에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현대의 댄스에서는 둘 간의 호흡을 맞출 때 신호를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지만 않고, 타이밍에 따라 리딩파트를 나누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둘의 몸동작이 춤의 형태로 보이기 위해선, 리듬에 맞춘 상대방과 나의 움직임이 미적(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더라도) 가치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상호동의하에 동기화된 움직임을 연습해도 쉬운 일은 아닐 테다. 모두가 리딩 가능 할 만큼 능숙하거나, 최소한 리드와 팔로우 간 호흡이 맞아야 한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자유로운 사람의 움직임에 맞추어 partner dance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힘든 일일 테고, 심지어 대상이 사람도 아니라면... 어렵다. [^6]
새란 것이, 실시간의 판단력을 위험회피에 탕진하는 존재다 보니 경계심이 늘 상당하다. 서울의 복판에 수 십종의 새가 살고 있음을 아는 이가 드문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일상의 [^3] 사람들이 눈으로 식별 불가능한 범위 밖에서 도망친다. 애초에 큰 것이 작은 것을 보는 게 유독 불리한 탓도 있다. [^4] 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조그만 숲(이라기보다 버려진 공간)에서도 수 종류의 새소리가 들려온다고 한다. 좋아하면 울리는, 소리. 새와 춤을 춘다는 행위는, 자연히 어려워진다. 도망만 치는 움직임을 따라가는 행위는 예술성보다 괴롭힘을 떠올리게 할 테니까.
까마귀는 딱 돌이 닿지 않을 만한 위치를 선점해서 높이 앉는다. 서로 간에 알 수 없는 신호를 주고받으며. 내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가끔 소리의 패턴이 바뀌기도 하니 서로 간에 위험물[^5]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미 충분히 먼 곳에 가있기에 내 행동에 맞춰서 울음소리를 자주 바꾸지는 않는다. 나를 위한 노래를 불러주진 않는 거다.
참새는 순진무구하다. 작은 새들은 못 오리라 믿었던 거리까지 파고들 때가 있다. 딴 데 정신이 팔려있는 경우에. 대신 작은 기척에도 반응하여 도망치기에 섣부른 행동에도 위태로움이 거의 없다. 살금살금 다가가도 한 번에 흩어진다. 여러 마리 중 한 마리만 감지해도 서로를 쫒으며 날아가 버린다. 관찰은 되지만 어울리긴 어렵다.
비둘기, 비둘기야 말로 그런 나의 구원이다. 이 용감한 새들은 현대인의 속성을 꿰뚫고 있다. 일상에 진이 빠진 인간은 전력을 다해서 쫒을 의지 따위 남아있지 않음을 그 작은 눈으로 뚫어본다. 그렇다고 전철 속 사람마냥 무감각하게 공간을 파고들진 않는다. 날쌘 놈은 더 가까이, 둔한 놈은 조금 멀리 선다. 자신의 상태와 인간의 상태를 끊임없이 예측하며 자신의 공간을 창출한다. 이 활발발 함이 종종 사람을 무시하는 행위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일 뿐이다. 녀석의 움직임은 돌파하는 메시를 닮았다.
왜? 그렇게나 진심인 걸까.
비둘기의 관심은 생존에 집중되어 있다. 과감한 생존방식. 이 문제는 개체가 어째서 과감해졌는가? 보다는 과감한 형질의 비둘기가 더 많이 번식 가능한가란 방향으로 접근해야 될런지 모르겠다. 다만, 그들이 과감하다는 섣부른 확신에 대해선 비둘기와 춤을 추는 남자를 믿어주길 부탁한다. 어차피 이건 비둘기의 문제니까.
생존을 위해선 장, 단기적인 몸의 안전이 확보되어야 하고, 충분한 영양분 섭취가 필수다. 비둘기는 단기적인 물리적 위협을 극복하며 비교적 장기적 이득인 먹이를 '빠르게' 섭취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둘기의 음식을 탐내는 생물은 서울에 그다지 남아 있지 않은 것을 생각해볼 때, 이는 비둘기 개체들 간의 경쟁으로 인한 것임을 의심해 볼 수 있다. 다른 종들보다 먹이 창출능력(자연에서 먹이를 구해 먹을 수 있는)이 떨어지기 때문 일 수도 있지만, 더 나은 먹이(인간 부산물)를 발견한 것으로 볼 수 있어 그에 대한 판단은 어렵다.
지금을 희생해, 장기적 이점을 취한다. 녀석들은 도시인을 꽤 많이 닮았다. 조금 더 체면을 차리지 않는다는 것 정도가 다를까? 그래서 미움받는다. 완전히 다른 것에선 혐오를 느끼기는커녕 행동의 의도를 인지하기도 어렵다. 닮은 듯 그보다 더한 천박함이야 말로 밉살스럽다. [^7] 혐오는 닮음으로 인한 인지의 용이성으로 엿보인 싫은 점에 대한 자각으로 가속된다. 그것이 꼭 이성과 논리로 도출된 인지가 아니어도 된다. 무의식 중에, 내적 논리적 정렬을 하지 않고도 인간은 비교적 자기 경험의 총체적인 도출과 비슷한 판단을 내린다. 그것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기반 위에 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많은 도시 사람들은 비둘기를 싫어한다. 녀석들은 우리처럼 물욕에 강력한 목적의식을 보이고, 보다 천박하며, 많이 닮았다.
나는 비둘기를 보고 있고, 조금 덜 미워하고 싶었지만, 몇 마리를 몇 날을 관찰해도 쉽지 않다. 조금만 타협한다면 무언가 변할 것도 같은데.
낙엽이 한두 개만 떨어진 가을, 가련한 배달기사가 치킨박스를 언덕진 도로 위에 엎어 놓았다. 겨울이면 막대 없인 못 오르는 언덕, 이 나쁜 것에게 상응하는 대가가 있기를!! 나뒹구는 닭고기에 달려든 무리 중 두 마리가 나의 접근에도 꼿꼿이 나를 보고 있다. 별생각 없이 치킨의 날개부위를 피해 발을 옆으로 디뎠을 때, 일개 무리의 가장 용감한 비둘기는 남았고, 이인자는 물러났다. 아!. 순간 바라본 비둘기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녀석은 지금 치킨을 먹고 싶기에, 나의 조악한 가설로 세운 무대에 초청됐다. 이 거리만 유효하다면 녀석은 머무른다. 머릿속에 신촌의 비둘기들을 괴롭히며 얻은 수많은 리드방식이 들어있다. 녀석도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주변 살피기에 1, 나를 보는 것에 3 정도의 비율이다. 4분에 3박자. 잔 발로 유효거리 바깥의 닭고기들을 조심스레 차냈다. 목표가 명확해야, 리드 이후의 움직임도 명확해진다. 천천히 치킨조각을 중심으로 원을 그렸다. 녀석은 용감한 일인자. 강하기에 쉬이 날아가지 않을 거다. 녀석이 목표를 중심에 두고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 천천히, 천천히, 라르고, 라르고.
두 번을 오른쪽으로 딛고, 한 번을 왼쪽으로 딛는다. 나보다 잰 발로 녀석은 종종 거리며 리드에 맞춰준다. 한 발 물러나서 돌면, 녀석은 다가서서 돌고 내가 손을 조금 올려 부풀리면 뒤로 밀려나듯 물러났다가 다시 내리면 조금 다가선다. 신이 난다. 우리가 점과 날개(팔)뿐인 도형이라면 꽤 아름다운 함수 궤적을 그리고 있을 테다. 아다지오!! 흥이 오르고 박자를 올리며 나의 보폭도 좁힌다. 비둘기의 발박자에 운동화를 맞추어 놀린다. 안단테! 비둘기의 움직임이 좀 더 분주해진다. 잔발 하나하나에 싱크로가 맞아가자 발놀림과 머리놀림이 더 활발해졌다. 본능적으로 싱크가 맞으면 예측당하기 쉬움을 아는 듯했다. 모데라토!!! 십 수년의 미적분 수련이 헛되지 않다. 비바체!!!
앗. 차 차... 푸다다닥!!
스쿼트를 막 마치고 언덕배기에서 춤추던 대퇴사두가 박자를 견디지 못했고, 오른 무릎의 꺾임에 따라 왼팔이 크게 휘둘렸다. 허수아비 마냥 휘적휘적. 이런 낭패가 있단 말인가. 오전에 스쿼트 하는 것이 싫은 이유에 추가해야겠다. 순식간에 무도회에 홀로 남겨진 나는 인간의 수치심을 주워 들었고, 주변 테라스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해 대며 허둥허둥 도망쳤다. 기묘한 짜증을 내며.
그래도 재미있었어. 비둘기와 춤추는 것.
만원 버스에서 숨 쉬는 길을 여는, 춤.
[^1] : 위키백과 "춤" (인용양식 맞추려다 그냥 둠.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2] : 아무리 섣부른 통계학자라도 3 정도부터 의의를 찾는다. 2는 반복이라기 보단 우연임을 배제하기 어려운, 자연관찰 통계가 넘친다.
[^3] : 일상의는 산업화도 후기 산업화도 지나, 제3의 물결 마지막 시기에 접어든 현대시대에서 가장 신경쇠약이 걸린 형태로 뛰어다니는 한국인의 일상적인 평균을 이야기한다.
[^4] : 작은 것은 큰 것의 변화를 저 멀리에서도 수이 관찰 가능 하지만, 큰 것은 그만큼의 거리에서는 작은 것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진화되었다. (너무 많은 것을 보는 것은 신경쇠약을 부추길 뿐이다.)
[^5] : 낮은 확률로 '나'다.
[^6] : 이를 위해선, 유치원 선생님의 뼈와 피를 갈아 만든 학예회 춤을 보면서 생각해 보기를 추천한다. 아이들을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게 했을까, 선생의 숭고함이 느껴지는 영상이다.
[^7] : 인간 실격적인 모습. 그저 금수적 행동에서 우리는 혐오가 느껴지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 비슷한 듯 묘하게 조금 더 나쁜 형태로의 발현에서 더 많은 구역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까뮈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언젠간 쓰도록 노력은 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여기선 노력하려는 척하는 게 조금 더 이미지상 유리해 보이니 대충 그렇게 읽어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