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벨 연구소의 젊은 과학자 펜지어스와 윌슨은 얼마나 놀랐을까? 위성 신호를 잡는데 자꾸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신호음이 들려왔으니. 그 잡음을 없애기 위해 안테나를 점검하고, 빗자루로 비둘기와 그 배설물들 까지 퇴치하고서야 그들은 알았다. 우주의 텅 빈 공간은 그저 빈 진공이 아니라는 것을. 거기엔 138억 년 전 빅뱅이 남긴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복사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내가 여기서 집중하는 부분은 정성 들임에 있다. “우리는 그저 지워지지 않는 잡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따라갔을 뿐이었다.” 그 본인들이 회고한 말을 돌아보아도, 그들의 연구는 장비가 특별한 것 만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하나를 깊게 들여다본 행위에 좀 더 무게를 실어도 될 것 같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아무것도 없는 거라 추정되는 것에서 나온 전파. 반복해 사실을 확인하고, 이유를 찾고, 이름을 붙이는 과정은 더 큰 진실과 만나게 해주는 발견으로 이어졌다.(우린 이걸 과학이라 부른다.) 현대의 당연함. 이 우주를 탄생시킨 빅뱅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는 인식은 그 발견 이후에 형성된 합의이다. 그들의 정성 들임이 더 진실에 가까운 직관을 형성하는 단초가 되었다.
나의 경우엔 이런 배경 복사와 같은 신호들을 사람과 사람의 사이. 인 간(間)에서 느끼곤 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은 대개 평균적인 어떤 작용으로 끝나고 말긴 하지만, 때로 몹시 놀라운 상호작용과 그로 인한 상승 작용을 만들곤 한다. 학급에서 전혀 맥을 못 추던 두 학생이 짝이 되자 영혼의 개그콤비로 다시 태어날 때. 일상에 쉽게 무너지던 친구가 자식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불굴의 의지를 가진 부모로 성장할 때 느껴지는 파장들. 단순한 관계 이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거기엔 비선형 적이고 일반화되기 어려운 종류의 작용이 일어난다.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 궁합이니 귀인이니 하는 단어들로 대충 의미를 뭉뚱그려 놓고 지나가지만. 그런 관습적이고 분석되지 않는 단어들로만 남겨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름의 직관으론, 이런 해석의 어려움은 보통 인간을 단위 원자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을 하나의 통일된 단위체. 분절되어 있고 독립적인 행동의 주체로 바라보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여러 면에서 부적합한 해석임이 드러난다. 이런 내적 모순은 문학과 철학에서 오래전부터 주목받아 왔고, 현대의 인공지능 모델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드러난다.
우리는 스스로도 모순된 의지를 품게 되곤 한다. 그로 인해 고통받고, 선택의 어려움도 겪는다. 오죽하면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그러한 모순을 보편적인 극으로 완성해 냈겠는가. 실제로 인간의 뉴런을 본따서 만든 인공지능의 퍼셉트론이 연결된 신경망 데이터를 까서(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데이터를 행렬연산화 해서 결과를 분석해서) 확인해 보면 학습 정도나 방식에 따라 부분 부분의 신경망이 서로 상반되는 결괏값을 뒤쪽의 판단체로 전달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인간도 각기 다른 뇌세포가,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상반된 신호를 함께 내보내는 작동을 하는 생명체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럼 짜장과 짬뽕이라는 단순한 선택 앞에서도, 오늘의 상황 기본적인 선호, 분위기와 맥락에 의해서 모순되는 두 개의 마음이 발현되는 것은 외려 당연해 보인다. 인간이란 내부에 모순된 가치를, 분절된 영혼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를 우리가 현재 다루는 통계학에서는 기술하기가 어렵지만 양자역학에서 사용하는 힐베르트 스페이스를 이용한 표기에서는 쉽게 기술할 수가 있다. 인간은 거시적으로 하나의 통일체로 행동하지만, 그 안에 분절된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양자적 정신을 가진 존재임이 기술 가능해진다. 그것이 좀 더 우리의 본질을 잘 표현할 수 있고!
이 틀로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인간(人間)을 들여다보면 놀라운 것들을 설명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결이 잘 맞아서 뭔가 이야기가 잘 되는 관계는 서로가 인지에 사용하는 기본적 관념들이 비슷하게 뭉쳐 있어 의사소통에서 별도의 해석과 번역 없이 전달이 되는 것. 비슷한 베이시스를 가진 경우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이 스스로 모순되어 있지만, 특별한 시퀀스(명상, 자기만의 루틴)를 통해 해소하는 과정을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내부의 순환을 통해, 흐트러져 모순을 일으키는 인식들을 침잠시키고 원하는 방향으로 자기 정렬을 하는 것으로!
인간을 하나의 벡터처럼 취급하는 데서 나아가 텐서의 복잡함, 비선형성을 품은 존재로 쓰는 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무시해 왔던 인간 내적 상호작용과 외부와의 상호작용을 한층 깊게 이해하게 해 줄 것이다. 더 나아가면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중요하지 않다 여기던 것. 분위기나 정서가 사실은 배경복사처럼 전체 사회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밝혀내는 통로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너무 간추려 요약된 정의에서는 어떤 현상들이 아예 기술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점질량으로 표시된 물체에선 회전관성을 만들 수 없듯이!
선택이 가능하다면 나는 모르는 이들에게 선사한 친절의 효능을 가장 먼저 증명하고 싶다. 길 고양이들도 다정함에는 행동 양상이 변한다. 누군가 고양이 밥만 꾸준히 골목에 내려놓아도, 고양이는 밥을 준 사람을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한 층 낮춘다. 배를 깔고 드러누워 바라보거나, 가게 앞에서 사람과 맞딱 뜨려도 도망대신 천연덕스러운 자세를 취하곤 한다. '인간'이라는 형상 자체에 대한 맥락이 긍정적으로 형성된 것일 테다. (그 태도만으로 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고양이를 대하는 평균적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하물며 인간에 이르면 그 효과는 어떨 것인가? 나는 그것이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남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에 나의 물리를 걸었다.
새로 발견해 낸 틀과, 지극한 관심. 이 두 가지로 우리는 인간을 좀 더 다층적으로 해석해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니 추정한다. 확신할 수 없는 직관 속에서 십여 년. 수모를 당하고 나서야 조금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친절함은 순환하는 것이라고.
알게 모르게 나의 마음 어딘가에 심어져 있다, 툭 다시 튀어나오는 형태의 배경복사를 이루고 있다고.
무심히 흘려, 사람들 속으로 반향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던 나의 친절이. 당장의 감사나 친절로 되돌아 오진 않지만. 누군가의 마음속 무의식에 남아 다른 상황에서 전혀 다른 형태의 배경 복사가 되어 전달될 것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안심하게 하는가. 실제로 인간은 그런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것 같고 말이다.
여기에, 이 글의 직접적 씨앗이 된 부평역, 칼국수 집에서의 경험을 기록해 둔다.
무심한 듯, 군더더기 없는 친절함은 맛집의 특색인데. 거동이 힘든 동네 어르신은 또 살뜰히 챙기는 그 마음씀이 동네의 일상을 밀어주는 배경복사로 작용 중임을 알 것 같았다. 저런 아주머니가 동네에 많으면, 마을 전체가 마을로서의 유대감을 유지할 수 있다. 나는 그 차가운 따듯함, 무심한 배려가 좋아져 안 그래도 맛있던 콩국수가 더욱 맛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