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내릴 사람들이었다

- 2016년 5월 19일 작.

by 지음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양보하는 것은 필수가 아니며 강제할 것도 아님에 동의한다.

반강제성을 가지며, 사회적 압력 혹은 도덕으로 작용하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추억도 무늬만 남은 이야기다. 외려 요즘은, 배려석에 앉을 수 있는 집단들 간의 이익 다툼의 소재가 될 뿐이다.


양보란 배려에서 시작되는 행동이다. 배려란 타인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 배려하다라는 단어 속에는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전제되어있다. 그래야 서로 간의 다름을 생각할 가능성이 생긴다. 다름에 대한 여유 있는 태도, 다정한 마음에서 배려는 시작되는 걸 테니까.


서로 다른 두 개인이 만난다. 사람은 두 명인데 의자는 한 개다. 시스템이나 구조가 잘못된 것일 수 있지만, 차치하자. 한 명은 서있어도 교통을 이용하는데 큰 무리가 없다. 다른 하나는 잠깐의 실수로 큰 부상을 당하거나 자칫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을 수 있다.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상황 자체가 불합리하다. 이 사실은 과거가 어쨌다느니 하는 역사성이나, 일반을 논하는 통계적 가정과 무관한 '현재'다. 상황을 인식 한 뒤, 조금만 다정한 마음이 생긴다면, 배려는 일어난다.


길게 썼지만 위의 모든 과정은 매우 순식간에 일어나거나, 혹은 습관처럼 몸에 배어있는 것이다. 읽는 데는 오래 걸렸지만, 상황이 닥쳤을 때 뇌가 처리하는 속도는 0.2초도 되지 않는다. 배려를 하는 마음 혹은 배려를 하는 행동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은 줄어드는데, 오직 행위만이 관습처럼 남았다. 이제 와서 배려하는 마음이 나은 유산이, 그저 다툼의 소재가 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남의 등창이 내 고뿔보다 못하다" 던가... 사실 인간이란 자기의 경험은 real 4d 영화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반면 다른 이들의 감정이나 경험은 간접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당장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느껴지는 약간의 지침이나 아픔 등이, 술 취해 다 죽어갈 듯 휘청 대는 이가 넘어져 다칠 아픔보다 생생하다. 타인의 경험에까지 기댈 생각도 없다. 오늘처럼 무리하게 스쿼트를 한날이 아니더라도, 편안히 앉은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수고로운 일이다. 나라고 자리가 텅 비었을 때도 서서 가는 마조히스트는 아니니까.


문이 열리고, 할머니 한 분이 올라선다. 등이 굽어 지팡이를 오른손에 잡을 수밖에 없었나 보다. 남은 왼손에도 짐 한 꾸러미를 들고 계신다. 이제 짐들은 놔두고 다니셔도 될 텐데, 살아온 세월만큼의 습관인지 정말 급한 것이 들었는지, 한 꾸러미에 몸이 온통 한쪽으로 쏠려있다. 보통 무게가 아닌가 보다. 나까지 맘이 무거워진다.


자리는 가까스로 모두 차서 서있는 이는 한두 명 밖에 없지만 남은 자리가 하나도 없다. 이미 한 번 어린아이에게 양보하고 난 뒤 잡은 내 자리는 뒷자리. 두 명씩 앉는 자리의 가장 첫 줄이기에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나라고 뭐 다를까. 오늘은 더 이상 일어나기가 싫었다. 할머니가 천천히 버스 위로 올라탄다. 누구라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 버스는 '한'사람을 태우기 위해 서있었다.


이 이질적인 공백은,

누구든 느낄 수 있을 만한 것이었을 텐데....


버스 기사는 휘청거리는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빡빡하게 차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퇴근 시간의 도로를 이리저리 틀어가며 달린다. 어서 구간을 끝내야 제시간에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걸까?? 세월에 가벼워진 몸이 앞뒤로 크게 흔들린다. 슬몃 바라다본 눈빛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내색하지 않는다. 저들은 분명 인식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재빨리 시선을 돌려 자기들 할 일로 눈을 돌린다. 검은 옷을 입은 아가씨는 퍼즐 게임이 아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중인가 보다. 하늘하늘 움직이던 손가락이 아주 분주해졌다. 흰색 헤드셋을 낀 청년은 노래가 신나는 것으로 바뀌었나?? 갑자기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고 있다. 곱게 차려입은 아주머니는 급하게 전화할 곳이 생각났나 보다.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댄다. 그래도... 저들은 마음에 가책이라도 받는 사람들... 언젠가 상황이 좋아지면 한 번쯤 일어날 생각도 해보리라..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 이외의 대다수 사람들. 그들은 인식조차 하지 못한 듯했다. 긴 시간의 정차, 흔들거리는 강퍅한 몸. 그 시각적 정보가 눈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전두엽에는 전달되지 않나 보다. 물론 이것은 내가 뒤에서 바라다보며 내 마음대로 상상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투명하게 지나가 버리는 걸까? 그들의 타인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머엉~ 한 자태들을 바라보다 내 정신까지 멍해져 버렸다. 순간 너무나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소리쳤다. "여기로 오세요. 할머니!!!"


물론 오늘 있었던 일이, 내가 최근에 서울로 돌아온 뒤 버스를 타며 있었던 가장 나쁜 경우에 속한다는 것은 분명히 해야겠다. 세상에는 아직 양보하는 사람들이 많고, 훈훈한 모습에 미소 짓게 하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완벽한 반대에 해당하는 사례를 보고야 만 것이다. 내 앞에는 적어도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지만(옆 뒤까지 합치면 너무 많으니까..) , 모두가 일치단결해서 '그' 정보를 무시해야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


내가 빨랐나??라고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는 앞뒤로 흔들리는 할머니의 모습까지 모두 본 이후가 아니던가. 위험한 상황에서 타인의 아픔을 배려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은 물론, 상황을 인식하는 사람들조차 거의 없는 사회라니. 우연히도 모두가 소시오 패스인 사람들이 타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만약 그렇다고 쳐도 사회에 소시오 패스가 얼마나 많길래 한 버스에서 그런 현상이 발 생 한단 말인가???)


순간 요즘 느끼던 박하고 이기적인 서울의 사람들 모습이 스쳐 지나가면서 오싹함이 느껴졌다.


더 극적인 상황은 바로 다음 순간에 일어났다. 할머니가 버스를 탄 정류장은 호림박물관. 양천차고지에서 출발하여 개봉역을 지나는 643번 버스는(일부러 버스 번호를 적어 두련다.) 곧 신림역에 도착할 터였다. 딱 두 정거장. 그래도 사람들이 좀 내리는 역이기에 나는 앉을자리가 생길 테니 다행이다.. 하던 차였다.

그때,

나는 보았다.


요지부동이던 사람들이 3~4명만 남겨 놓고 모두가 내리는 광경을.(할머니까지도...;;).

30명에 가까운, 그 꽤 많은 사람들이 전부 1 정거장만 가면 내릴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1분 30초의 불편,

낙상,

1분 30초의 불편.

죽음에 이르는 상처.

1분 30초의 불편.....


나는 그런 사람들과 같은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 싫어졌다. 괜히 요즘 헬조선이라 하는 게 아니구나..... 악마는 거대한 곳에만 있지 않고, 작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손 뻗치고 있다 했던가... 과대망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그 모습에서 슬픈 사회 현상들이 스쳐 지나가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오늘 악마를 보았다...




9년 전에 쓴 글을, 어색한 부분만 고쳐 올렸습니다. ^^

더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날것의 느낌, 그때의 느낌을 모두 형용하지 못해 남겨둡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늘 행복 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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