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를 바라보며 혐오감이 올라오거나, 이유 없이 가여워 눈물이 난다면 좋다. 그 감정을 위해 몇 분만 시간을 내어주자. 아깝다고, 바쁘다고 손사래 치지 말고. 그 잠깐의 시간이 신문과 방송, 사이비와 정식종단. 심지어는 정부나 지자체에게 속아서 사라지는 돈이나 시간을 아껴줄지도 모르니까. 한 발짝만 앞으로 다가서 보는 거다.
인류 전체로서야 아는 것이 반드시 힘이 될 날이 올 수도 있지만,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꼭 그렇지도 않다. 인간 하나가 알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부족하고, 어설프게 아는 것은 꼭 불상사를 일으킨다. 인간을 이용하고 싶은 놈들의 마음은 하나같이 약아빠져서, 그런 곳을 집요하게 물어뜯는다.
얄팍함에서 그 한계점이 분명하다 해도, 승냥이 떼는 쉽게 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홍대의 커피빈에서 퍼스널 컬러 상담해 주는 아가씨와, 성격 유형 검사를 하며 조언해 주는 청년, 근처 마음-명상 센터 앞에서 영업하는 아줌마가 모두 인사하는 사이라는 것은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그리고 위험하다.
그런 이들이 하나로 묶인 다는 것이 의아해 직접 명상 센터에서 1시간 반의 상담(탐색)을 해본 뒤에 하는 말이다. 30분만큼은 신뢰를 가져도 된다. 그들은 결국 어떤 친분을 만들어 모임으로 이끌고, 그 모임엔 미팅에서 몰아주기 하듯 인격 몰아주기를 받는 사람이 있다. 그가 그대를 한국에서 다시 태어난 예수님을 영접하게 해 줄 그 사람이다.
요즘의 유행, 인간의 기본 유대감. 집단 내에서 느끼는 심리학. 이 모든 것을 실전 감각으로 단련한 프로를 상대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각각의 조예가 낮다 하더라도 그 연계가 몹시 유연하여 빈틈이 거의 없다. 이때 어쭙잖게 아는 것은 큰 약점을 제공한다. 온전하지 않게, 그저 막연히 그런가 보다고 납득했던 지식이 그(녀)의 말에 동조하여 상대의 편으로 돌아선다. 직관은 아닌 것 같다는 명확한 신호를 주지만, 곧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맘이 흔들린다. 그대가 혹시 약해져 있거나, 우울하고 외로운 상황이라면 더욱.
사이비에 왜 걸려드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판단엔 논리가 아닌 감정도 끼어들기 때문이다. 논리를 부수기 전에 마음이 먼저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대도 이 자본주의 하에서 멀쩡하게 밥 잘 먹고 산다면, 그런 속임을 몇 개쯤 받아들였음이 분명하다. 국가가 돌아가는 방식도 그러하니까. 그리고 우린 늘 자신의 경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
비둘기로 돌아오면, 이 가련한 생물은 너무 똑똑하다. 아는 것이 생존에 힘이 된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새들 중엔 자연의 원형에 가까운 것 이외의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종이 더 많다. 참새나 산비둘기. 물까치와 올빼미. 말하는 것이 입 아프다. 비둘기와 까마귀는 상당히 적응력이 뛰어난데, 인간이 버린 음식물 쓰레기와 피자 박스를 뒤질 줄도 안다. 언덕길을 오르다 전복한 치킨 박스를 본 적이 있는가? 정신없이 먹는 것들을 쫓아 버린 박스 안 치킨엔 비둘기부리 모양의 자국이 그득히 나있다. 차이가 있다면, 까마귀는 조금 자신의 삶을 유지 한 채로 인간의 부산물을 이용한다면, 비둘기는 완전히 인간 생태에 동화되었다는 점뿐이다.
신촌 대로에 자리 잡은 비둘기들. 여의도 공원과 경의선 철길공원에 앉은 그들을 관찰한 적 있는가? 위치 선정이 정확하다. 인간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 모여 있고, 그중 안전한 곳에만 배를 대고 눕는다. 영양가 높은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나오는 곳을 알고, 어느 고양이 급식소의 녀석이 비둘기를 공격하지 않는지 꿰고 있다. 생존에 관해서라면 그 지적 능력과 모험심을 아끼지 않고 사용한다. 날아가지도 않고 게으르다는 것은 착각이다. 4걸음에 3번을 째려보는 눈으로. 녀석들은 그대가 비둘기에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갈 인간임을. 비둘기를 쫓을 이유도 의지도 없는 인간임을 알아챈다. 조금만 막대를 휘두르고 다니면 그들이 나와 유지하는 거리는 1미터쯤 늘어난다.
당연하게도, 이런 걸 안다고 그대의 그 분노. 혹은 눈물. 그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특정할 수는 없다. 정확한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다만 일반론을 좀 지껄여 보자면, 비둘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분수를 잘 안다. 먹이 경쟁을 하는 때, 덩치 작은 녀석은 안쪽 보다 외곽을 택하고 큰 놈은 주변 것들을 성난 깃으로 쫓아낸다. 날개를 다친 놈은 빠른 달리기를 활용하고, 발가락이 잘린 녀석은 경계 범위가 넓다. 평균보다 인간에게서 멀리 다닌다. 인간과는 다르게.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분수를 지키며 도시 한켠을 살아간다. 인간이 비둘기 보다 멍청하다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알고 있어야만 하는 종목이 더 많다. 많은 관념과 이득, 논리를 만들어 낸 탓에 우리는 더 쉽게 소외된다. 비둘기적 행복에 만족하지 못한다. 비 맞아도 행복하고, 음식물 쓰레기로 만족하는 인간이란 드무니까. 우린 세상의 논리와 방식을 익히지 못하면 자연스레 밀려나는 위치에 서있다. 위태롭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거나, 몇몇 견고한 지식들로 보호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쉽다. 계속 갈고닦아야 유지 가능함은 물론이고.
하여 우린 언제나 자기 자신을, 자기 분수를 잘 모른 채로 익숙한 감정대로 행동하기 쉬운 존재로 살아간다. 세상을 살아갈수록, 해온 대로 익숙한 대로만 하는 것은 그것의 압도적 유리함을 알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곳에 발 들이면, 광활한 다양성이 넘실대는 도시의 삶. 온수역과 강남역은 전혀 다른 법칙으로 돌아간다. 그 안에서 끊임없이 소외될 위기에 처한 것이 사회 속의 인간이니까. 커피숍인 줄 알고 클럽에 발들였던 누구의 모습처럼. 그런 익숙함 선호가 또 다른 소외를 만드는 것 까지를 포함 하여!!
논리적으로 결론 내리지 않고도 우린, 그것을 감정적으로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그 이해와 감정이 어느 정도 차올랐을 때. 나와 닮은, 그러나 분수를 잘 아는 비둘기들. 더 무사태평하고 자신만만한 녀석들의 모습에 연민도, 분노도 때론 혐오도 밀려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러니 쌓인 감정을 논리로 정렬만 해주면 되는 지금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마저도 감각하지 못한다면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야 했을 테니. 위태롭기 그지없다. 2000년 전의 아테네 사람들처럼, 소크라테스를 죽이겠지.
그래서 이 쓸데없는 비둘기에 대한 고찰은 여기서 갑자기 끝이다. 인간은 어차피 동물이지만, 모든 비둘기에게 돌팔매질하거나 눈물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짐승이 되고 말 것인가. 세상이 그렇게 바뀐다는 이야긴 들어본 적 없지만 그대가 그걸로 좋다면 뭐 그것도 좋겠다. 유치장에 가면 전화하시길. 비둘기에 관한 문제라면 내 한 번은 도와 드리리. 나도 몸이 하나라 매번 그럴 수는 없으니까. 되도록이면 그 감정을 거울 앞이나 일기장 앞에서 차분히 써보도록 하자. 어느 집 창밖을 내다봐도 활개 치는 비둘기를 바라보며.
그대의 비둘기 이야기를 기다리겠다. 늦더라도 꼭 답장하겠다고 약속한다. 평안하기를. 나의 d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