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급식소의 평화

by 지음

고양이 급식소가 있는 한 고양이는 새를 잡지 않는다. 사료가 퍽 맛있는 모양이다. 품도 덜 들고.

집으로 가는 언덕길 중턱. 늘 신선한 물과 사료가 채워져 있는 전봇대 옆 고양이 급식소에서, 비둘기는 고양이를 많이 경계하지 않았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슬몃슬몃 거리를 벌리기는 했지만 날아올라 완벽한 안전지대로 도망갈 생각을 않는다. 먹을 것에 정신이 팔려서기도 하겠지만, 마치 상대방이 굳이 공격하지 않을 것을 다 안다는 투다. 힘껏 달려든다면 고양이가 아니라 나였대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리를 서성인다. 지나가는 행인에 대한 반응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키웠던 고양이도 쥐를 잡지 않았다. 구조된 고양이와, 해부 실험에서 살아남은 검은 쥐. 어설픈 동정심에서 비롯된 동거는 기묘한 평온함을 유지했다. 케이지 문을 스스로 열고 탈출한 쥐와 고양이는 같은 공간 속에서 각자의 평화를 영유했다. 고양이는 그 쥐를 끝내 쫓지 않았다. 쥐가 내게 쫓기다, 고양이의 몸통에 부딪힌 순간에도 고양이는 앞발을 들어 쥐를 보내줬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는 눈으로.


배고픔을 경험한 적 없는 생명은, 피식자를 향해서도 그 잔학함을 수이 드러내지 않는 법일까? 먹는 것이란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것일 테다.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골머리를 싸매는 현대의 인간 사회와는 달라 보인다. 죽여서 피를 빼고, 내장을 분리해 조각조각 나누어 씹는 것만이 먹는 행위 일까. 상대가 오래토록 모아 온 돈을 어떻게든 내 것으로 하기 위해, 주어진 자원을 '쟤가 아닌 내가' 가지기 위해 거칠게 밀어붙이는 우리의 모습은 결국 누군가의 삶을 씹어 삼키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어쩌다 우리는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가 돼버린 걸까. 내 미미한 관찰로도, 풍족한 먹을거리가 있다면 동물들은 굳이 살아 있는 것을 해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2025년의 문명이 생산하는 물질이 부족한 걸까? 답은 예니오라 말해야 할 것이다. 부족하진 않은데, 결핍된 상태에 놓여 있다.


소로와 많은 선사들이 삶으로 증명하였듯 우리 인간이 스스로의 생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의외로 많지 않다. AI와 로봇이 발전하기 전에도, 전 세계 생산량은 지구 전체의 인구의 3배를 부양하고도 남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필요’가 아닌 ‘구조’를 위해 배분을 막아왔다. 더구나 그 결핍을 보완하기는커녕, 미디어는 부족한 자원을 더 갈망하고 욕망하도록 자극했다.


더 많이, 더 크게, 더 화려하게. 인간의 상상력을 '지금 가진 것보다 더'로 자극시켜 놓고는, 시스템으로 가로막아 그 열정을 사회를 돌리는 동력으로 삼는 구조.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을 일부러 길러내는 구조다. 인간은 이제 눈앞의 당근을 먹으려 앞으로 뛰는 당나귀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 결핍이 자원 획득을 위한 노력에서 서로를 향한 잔혹함으로 번져가는 중이다.


신자유주의는 그런 면에서 나와는 상극이다. 무한 이기주의와 자연에 가까운 생존 경쟁을 악용한다. 이 정신 나간 체계는 사람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기본 전제 자체를 위협한다. 사람의 사회적 본능을 억제한다. 상호 경쟁은 대등할 수 있는 존재들끼리, 사회의 화합을 깨지 않는 선에서 권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 낭비를 막기 위한 보조적인 용도로는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제1 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뭐? 보다 못한 "알빠노"를 외치며, 외면보다 조롱으로 서로를 내리 깎는 시대. 결국 터진 곳에서부터 서로의 발목을 잡고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진다. 인간은 왜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가리고, 그에 역행하는 행동을 권장하기 때문에... 국소적으로 옳아 보이는 순간들도 전체에는 늘 해가 되는.


그 체계 안에서, 우리는 냉혹함과 배타성을 디폴트라 여기며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중인 것만 같다. 결혼 적령기를 지난 청년이 명절에 대해서 느끼는 부담이 다르듯, 소비와 경쟁을 가속시키는 사회 안에서 각자가 느끼는 무게도 다르다. 사회에 당장 환원받기 어려운 형태의 재능, 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겪는 과한 고통은 아직 오지 못한 무언가를 눌러 죽인다.


살만한 곳에서 왜 저런 테러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은가?라는 식의 비정상성을 가정한 추론으로는 그 무엇도 밝혀내기 어렵다. 살만하다의 기준은 개별 인간의 자아에 달린 문제이고, 일부 특수성을 탓하기보다 어떤 경우에도 다정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이 더 올바른 방향이다. 타인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놓을 수 있는 충분한 복지, 아니 그보다 나아간 기본 소득은 그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이 사회에 속한 사람으로서 더는 떨어질 수 없는 어떤 선은 단순히 동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서로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수행한 기본 소득 지원 정책이 화폐 순환에 의한 경제적 논리 이상의 가치를 갖는 이유기도 하다. 고통이 과할 때는 나라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리란 믿음은, 우리가 사회를 인식할 때 느껴지는 온도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서로를 더 믿고,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게 만드는 씨앗으로 심긴다.


나는, 그런 논의를 하고 싶다. 우리의 존재성 자체를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마중물로서의 기본소득에 대한 토론. 단순한 경제원리를 넘어서는 인간성의 기본 값이 변하여 일어나는 사회의 긍정적 효과들에 대한 진지한 논쟁. 그런 토론이 공론의 장에서 이루어지고, 정책으로 반영된다면 우리가 얻게 될 것은 단순한 경제적 번영이 아니라 진정 행복에 가까운 무엇일 테니까.


"국가의 역할이 달라지면, 국민의 삶이 달라집니다." - 진보의 미래 중에서.


인지 방식이 달라지면, 우린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고양이와 비둘기가 한 발짝거리에서 나란히 고개를 숙이고 먹을 수 있는 이유는, 그곳에 사료와 물이 늘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1] 인간사회도 마찬가지다.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기본 소득은, 우리가 서로를 잡아먹는 관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먹고사는 걱정이 사라지면, 인지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무엇이 위협인지, 무엇이 경쟁자인지, 무엇이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감각이 바뀔 것이다. 같은 인간이라 해도 전혀 다르게 정의되는 존재. 그 변화는 행동을 바꾸고, 행동의 반복은 존재와 사회를 바꿔나갈 것이다. 그런 세상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고... 비둘기 급식소의 평화 속에서, 잊었던 작은 소망을 느꼈던 하루.




[1]: 풍족하면 정말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댈까? 난 아니라고 본다. 적절한 교육과, 약간의 이끄는 힘만 존재한다면 인간은 늘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란 믿음이 있다. 가진 자들이 말하는 경제적인 '아무 일'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위한 진정한 일은 여기에서부터 꽃 필 것이라는 확신. 뭐 아니어도 상관없긴 하다. 어차피 그런 인류에겐 더 많은 자원이나, 기술이 있더라도 언젠가 자멸로 가는 길만이 존재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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