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난다는 표현은 절묘하다. 감탄스런 외모에 붙는 '자체발광'이라는 수식어로 쓰일 때도, 안타까운 것들을 다정하게 품는 사람에게 빛과 소금 같다는 말을 할 때도. 순간 느낌을 간명히 비추어 준다. 태양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밝아지는 마음. 피부에 압력으로 느껴지는 저릿한 행복이 담기기 때문일까. 단어 하나로 시각, 촉각의 공감각을 불러일으키는 힘. 그것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전등이든 태양이든 상관없이, 빛에 의지해야 행위가 가능한 동물이 느끼는 축적된 감각 그 자체가 깨어나는 것 같다. 나만 그런 건가?
내가 가끔 더 놀라는 이유는 그 사용 방법의 정확함에 있다. 사람들은 온전한 빛의 물리학을 이해하지 않고도 정확한 메커니즘대로 빛을 다룬다. 빛은 진동이다. 정확히는 파동. 전하를 가진 것이 속도나, 가속도를 가지고 있을 때 퍼져나가는 것. 공기 중에서 손바닥을 휘두르면 바람이 생겨 퍼져 나가듯이.
다만 이 빛이라는 이름의 전자기파는 힘을 매개해주는 공기 같은 것(매질)이 없더라도 전기가 자기를 자기가 전기를 유도하며 나아간다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스스로 진공도 넘어 전달되는, 빛나는 것이라니. '자체발광'이란 말이 이다지도 어울리는 현상이 있을까.
빛을 뿜어내고, 흡수하는 과정에 대해서 조금만 미시적인 관점으로 들어가면 더 재미있어진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왔듯 원자 안에 갇힌 전자는 층층이 나뉘어 있는 공간(에너지 공간)에 머문다. 행성의 크기와 무게에 따라 그곳을 탈출하기 위한 연료의 양에 차이가 있듯. 서로 다른 높이에 위치한 전자 감옥들도 탈출하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다르다. 하여 이쪽 감옥에서 저쪽 감옥으로 갈 땐, 그 필요한 에너지의 고저에 따라 에너지를 방출하기도 빨아들이기도 하는데 그것을 빛이 이어준다. 빛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면 높은 에너지 감옥으로 이동하고, 낮은 에너지 감옥으로 떨어질 땐 빛을 방출한다. 에너지의 낙하와 상승이 빛을 이루는 근본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빛이 난다라고 표현하는 상황을 돌아보는 것은 내게 꽤 깊은 감명을 남겼다. 내면의 다정함을 실제적 도움으로 바꿔 나가는 사람의 빛남. 그것은 자신이 가진 다정함의 에너지를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전해주는 데서 느껴지는 것이니, 에너지가 있는 곳에서 필요한 곳으로 흐른다고 할 수 있다. 그때 느껴지는 빛은 우리에게도 따스하고, 감동적으로 느껴지는데 마치 다정함이 빛으로 형상화된 것만 같다. 실제 빛이 발생하는 원리를 따라서!!
그렇다면 원영이와 차은우의 빛남은 어떤가? 세상에 없을 것 같이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볼 때, 이번엔 우리의 마음속에서 기쁨과 환희의 감정이 차오른다. 어떤 생물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이유로 우리는 고조되어 가는 감정을 맛본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느낀다. 이렇게 에너지 준위가 올라가는 것은 그것을 매개해주는 무언가가 우리 안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란 것을. 그것은 다른 매질을 통하지 않고 직접 적으로. 그 아름다움을 인지하게 해주는 광경이 우리에게 닿는 것과 같은 속도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빛. 딱 빛이 가진 성질이다. 실제로 시각은 빛을 매개로 인식하기도 하고! 자신의 차오르는 에너지 준위를 바라보며 우리는 툭 내뱉듯 말하게 되는 것이다. 빛이 나는 외모다,라고. 나는 지금 그가 쏘아내는 파동을 받아 기분이 올라가고 있다고.
빛, 전자가 에너지 낙하를 통해 내뿜는 것 말고. 존재의 도약 혹은 낙하로 인한 파동이 만드는 것. 인간을 흔드는 모두를 뜻하는 '빛'을 사랑한다. 그것은 어떤 어둠 속에서도,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도 전달되는 마음. 전이라는 말이 현실에 적용되기 이전에 가졌을 어떤 전달을 품고 있다. 다정함이 깃들어 있다.
작은 물건도 그것을 오래 만지어 다루면 그것만이 가진 궤도로, 부지런히 인지를 가진 것(인간 등)으로 보내오는 흐름이 있다. 깨진 아스팔트 위로 핀 풀 꽃. 우연히 식물 앞에 놓인 색색의 돌. 어젯밤 잠든 틈에 만진 네 볼과 같은 것들. 나는 그런 결들에 닿은 채 걷는 것을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행복하다.
내겐 네가 빛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