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투명한 플라스틱 막 뒤로,
흐리게 보이는 푸르름은 왜 마음을 설레게 하는 걸까요?
항상 웃자람을 지향하는 식물들은 결국 경계석을 넘고.
여름 내 방치되었던 버스 정류장이나, 가게 앞. 반 투명 차양막은 이제 루꼴라 토핑을 얹은 피자(알라 루꼴라)처럼 폭신하고 푸른 두 번째 지붕을 얹고 있습니다. 이 차양막이란 것은 나라마다, 지역마다 비슷한 듯 달라요. 투명과 반투명을 넘나드는 다양한 재질을, 그들에게 익숙한 선의 모양으로 구부립니다.
나는 그중 투명한 것은 빼고, 반 투명하거나 흐릿한 처리가 된 것. 혹은 거의 투과되지 않는 흰색의 플라스틱이나 살짝 그 뒤의 음영이 드러나 보이는 가림막 뒤의 식물. 날것의 결과 색감은 물러나고 형태만 강조된 그림자를 좋아합니다. 실은 그림자와 실물의 중간쯤에 속한 비침에 끌려하고 있습니다. 꽤 오래지요. 2020년의 제주도 사진에서부터 22년의 런던. 오늘 성산로에서 연남동으로 건너가는 지하도까지. 몇 십 개의 서로 다른 초록 그림자가 사진첩에 있으니까요.
오늘도 그 신비함을 찍어 남기며, 골똘히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어요. 멈춰 선 정도로는 도저히 알 수 없어, 나는 오늘 하루를 이 질문과 함께 걷기로 했습니다. 사진첩과 일상을 샅샅이 훑어보자고 마음먹었어요. 독초 옆에 해독초가 같이 피듯, 달은 분명 주변에 달무리를 남겨 놓았을 것이니까요. 잘 보일 때와 아닐 때가 있긴 하겠지만.
8월의 뜨거움을 벗어나기 시작한 공기는 시원해 좋습니다. 나는 연남동을 벗어나 성산동으로, 다시 망원동으로 걸었습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을 담은 버스를 타고 경복궁을 지나 혜화동 까지. 철이 늦은 수국이, 파랑으로도 빨강으로도 물들지 않은 모습으로 길가에 피어 있었어요. 탁 트인 화단에선 별 생각이 없던 것이 철책으로 가리운 곳을 보자 마음이 톡 튀더라구요. 노천에 드러난 수국보다, 무늬 있는 철책 너머로 보이는 꽃에 더 이끌리는 건 어떤 뒤틀림이 낳은 결일까요.
첫눈에 느껴지진 않더군요. 이런 문제, 좋아해요. 사진첩을 찬찬히 되돌아보니 어제 인별에 올린 사진 같이 철창 뒤의 것을 찍은 일이 많더군요. 그런 건 보통 시나브로 평생에 걸쳐 추구하는 어떤 것과 메타포가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잖아요? 자연스레 가장 오래 붙잡아온 질문, 혹은 학문을 떠올려 보게 되는 거죠. 무언가 닿아 있는지.
물리. 나는 언제나 현재의 것을 가지고, 그다음 것. 알지 못했던 것을 밝혀 나가는 과정. 그중에서도 현상을 원론적인 것들로 쪼개어 이해하는 모델링에 모든 성인기를 바쳤어요. 현상은 언제나 선명하게. 하나의 완성된 세계처럼 고고히 서있고. 내가 다룰 수 있는 수학은 현대의 학자들이 다루는 것보다 좁은 틈에 있어, 현상에 닿기에 뭔가 부족하고. 당장 닿고 싶은 욕심이 쌓아 올리는 인내보다 좋았던 나는 늘 성급히 손 뻗었어요. 나의 현재를 갑갑하게 여기면서도, 닿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 기분은 독특한 무늬, 가로막힌 철창. 그리고 그 안에 숨 쉬는 식물이라는 메타포로 연결될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순간 깨달은 듯 썼지만, 꿈을 해석할 때처럼 나는 꽤 오래 사진첩을 보고 있었다는 점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거기까지 닿으니 생각이 일부 환해지더군요. 닿지 못하는 온전함에 대한 열망. 그것이 반 투명한 유리막에도 있었어요. 그럼 이제 문제는 왜 철창 뒤 식물보다도 많이, 한 경우에도 여러 번. 집요하게 촬영된 결과물이 사진첩에 남아 있는 지만 헤아리면 될 일이니까요. 문제는 이제 반신은 벗은 밀로의 비너스처럼, 신비롭지만 손 닿을 것도 같은 아름다움만을 품고 있어요. 힌트는 그 초록 그림자가 남긴 달무리. 감상이 남긴 감정 안에 숨어 있을 테니까요. 마음을 편히 먹고 천천히 걸어 두 번째 스타벅스로 갔어요. 나는 한 잔 먹으면 두 번째는 60프로를 할인해주는 쿠폰을 반드시 쓰는 남자니까요.
음영은 분명 결을 가려요. 이파리의 무늬와 질감. 색과 3차원으로 인지될 가능성. 그런 것들을요. 디테일은 그림자의 세계에선 뒤로 물러나고, 남는 건 차원이 축소당한 형과 태.
그런 일이 있잖아요. 우연이 주는 진전 같은 거. 난데없이 실험 데이터에 대해서 질문해 온 학생과의 팀즈 대화를 마무리 짓고 난 뒤에 문제로 돌아온 나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현상의 생생함이 주는 그것만의 감각이 있다면, 너무 많은 정보나 관찰이 오히려 근본적인 움직임을 못 보게 가리우기도 한다는 것.
흐릿한 색과 형태로만 남은 그림자는 많은 정보를 잃고. 대신 질량에 가까운 것. 우리(물리학도)가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 여기는 움직임들만 남는다는 것을요. 나는 무의식적으로 축약된 데이터를 바라보며 모델링하기 편한 형태로, 내가 아름다움을 느끼기 편한 형태로 변했음을 알아챈 것이 분명해요. 무의식적으로요. 본질이 되는 수식을 얻는 것을 업으로 삼아온 시간만큼 익숙하고 편안해진 그 감각. 이젠 나와 너무 닮아져 아름답다(순우리말 뜻으로 나 다움)고 말할 수밖에 없어진 것.
온전히 증명이 된 것이 아니지마는, 인간의 마음은 원래 직관적 연결이 우리가 닿을 수 있는 한계 인지 모르겠어요. 이쯤 쓰는 것이 몹시 무례한 일이 될 수 있음을 알지만, 여기서 헤어지기로 해요. 마음이 다시 현실의 것들에 붙잡히기 전에, 반 투명한 초록 그림자를 한 곳에 모아 놔야겠어요. 품고서 계속 들여다보면, 그중에서도 아름다운 것과 특별히 마음을 울리는 것이 나타나고. 나는 그 미세한 감각을 따라 이다음에 이어 붙일 자세한 이야기도 생각날지 몰라요. 그때까지 조용히, 완전히 안녕하기를. 그대만의 그림자를 찾길 기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