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2019.1.5
리스본으로의 입국 수속은 검역관의 ‘have a good vacation!’이라는 말과 따뜻한 미소로 이상하리만치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간의 악몽들이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현지의 날씨는 좋았고, 지친 몸을 곧바로 택시에 실었다. 숙소까지는 절대 20유로가 넘을 일이 없다고, 숙소 주인에게 들었는데, 택시비는 21.5유로가 나왔다. 팁을 자체적으로 계산했으려나...
에어비앤비로 계속 연락을 주고받던 마우로 대신 존이 숙소 안내를 해줬고, 포르투갈 와인 한 병을 선물로 줬다. 나는 답례로 디스 플러스 한 갑을 건넸다.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려고 제주공항 면세점에서 미리 한 보루를 사 두었다.
숙소에서 가까운 슈퍼마켓에 갔더니, 중동 사람으로 보이는 점원이 한국말을 건넨다. 한국에서 5년 동안 살았다며,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했다. 포르투갈에 처음 와서 들른, 첫 가게에서 중동 사람이 구사하는 한국말을 들으며 한국말로 대화하는 상황이 제법 낯설게 느껴졌다. 디스 플러스를 한 갑 건네려고, 흡연 여부를 물었더니, 담배를 피우지 않는단다. 그러면, 포르투갈 사람들은 무슨 담배를 제일 많이 피우냐고 물었더니, 포르투갈인들은 담배맛 따위는 생각지 않고, 싼 걸 산다고 했다. 그리고, 말보로가 제일 많이 팔린다고 했다. 젠장...
숙소 주변을 걷는다. 내가 머무르는 곳은 리스본의 알파마(Alfama) 지역이다. 좁은 골목들이 많다. 나는 태생적으로 골목을 좋아한다. 골목의 수많은 가능성들. 알파마 지역에 숙소를 구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시차 적응과 부족한 잠 때문에 정신이 몽롱하다. 여행을 왔다는 온전한 느낌이 아직까지 들지는 않지만, 그냥 무작정 걷고 본다. 그러다 뭔가 느낌이 오는(?) 식당에 들어갔다.
시키지도 않은 빵이 먼저 나오고, 주문한 문어 덮밥과 대구 구이가 나왔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시키지도 않은 각종 버터와 치즈를 빵에 발라먹으며, H와 나는 연신, ‘역시 유럽은 빵이 맛있어’ 같은 말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각자의 선택에 만족하며, 또 각자의 안목과 느낌을 믿어버리지만, 결국 양이 많아 음식을 남기고 말았다. 계산을 할 때, 계산서에 빵값이 따로 부가된 것에 약간 놀라지만, 당황하지 않고, 왠지 허망해져 식당을 나선다.
아마 누군가는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뚜렷한 여행의 목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는 나처럼 여행을 통해 그 목적을 뒤늦게 발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낯선 풍경들이 조금씩 익숙해진다. 살아가는 것도, 여행도, 자신에게 낯선 것들을 조금씩 익숙하게 만드는 과정일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공평한 한계 속에서.
다음날은 약간 맑아진 정신 상태로 이르게 숙소를 나서서 어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걷는다. 트램, 낯선 사람들과 건물들이 유럽임을 실감케 한다. 상조르제 성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따라 언덕을 올라간다. 사람들이 제법 많다. 그리고 사람이 많은 곳에는 어김없이 군밤 장수가 있다. 희뿌연 연기를 엄청나게 풍기며. 2유로를 주고 군밤 12개를 샀다. 맛있지만 목이 멘다. 상조르제 성의 입장료는 10유로다. 좀 더 지내다가 정말 내부가 궁금해지면 가보기로 하고, 테주 강 근처로 발걸음을 돌렸다. 강인지 바다인지 구분이 불분명한 테주강변에는 갈매기들이 앉아 있었다. 제방에 걸터 앉아 바다쪽 풍경을 보고 있는데, 모자를 눌러 쓴 낯선 남자가 다가오더니, 무언가 비닐에 포장된 물건을 내민다. 마리화나라고 속삭이며. 나는 ‘아임 오케이’라고 말하며, 남자를 돌려보냈다.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문다. 광장 바닥에는 말보로 꽁초가 즐비하다. 갈매기 한 마리가 먹을 것을 달라며 다가오지만, 담배 밖에 없다. 바이사(H&M이나 zara가 있는 걸 보면 번화가) 쪽으로 걷는다.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여자가 첼로를 연주하고 있다. 도보의 한쪽 귀퉁이에 멈처 서서 눈을 감고 연주를 듣는다. 사람들은 잠깐잠깐 멈춰서 음악을 듣는다기보다는 사진을 찍고 지나간다. 역시 음악가들은 어느 곳에서건 찍기 좋은 피사체인가? 파두(포르투갈 전통음악)를 연주하는 그룹과 사랑의 인사를 멜로디언으로 연주하는 장님 할머니를 지나친다. 음악이 연기처럼 나를 잠깐 감쌌다가 곧 사라진다. 음악을 들을 시간이 없다. 나는 갈 곳도 없으면서 괜히 바쁘다.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모피 코트를 입고 명품백을 든 백인 할머니가 H를 치고 간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내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오히려 나를 쏘아본다. ‘이 할망구가...’라고 맞받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필요까지 느끼지는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쓸 시간이 없다. 돈이 많으면서 심술궂은 할망구가 되는 일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스스로의 슬픔을 깨닫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고.
걷다 보면 자연스레 배가 고파지고, 허기를 느낄 때는 이미 늦은 상태다. 판단력이 흐려져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서 일단 앉고 싶다. 하지만, 여기는 포르투갈이고 아주 일상적인 일을 하는데로 일말의 용기가 필요하다. 들어가고 싶다고 선뜻 들어가지지 않는다. 그러면, 더 지치고...
결국, 폴딩 도어가 활짝 열려 있는 사람들로 붐비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와 빵을 시키고 구석에 자리잡고 앉는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흘깃흘깃 쳐다보는 정도가 아니고, 거의 뚫어질 정도로 쳐다본다. 실제로 동양인을 처음 본다는 듯이. 나는 좀 너그러워져 '그래 봐라' 하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살짝 미소라도 보낸다. 아마 나도 한국에서 포르투갈인을 처음 보았다면, 자꾸 쳐다보고 싶어 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포르투갈 사람인지 스페인 사람인지 프랑스 사람인지는 구별하지 못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