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아홉 시에 잠들어 11시 50분쯤 한번 깨고, 12시 40분쯤 두 번 깨고, 3시 40분에 깨고, 4시에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이를 닦고, 세수하고, 따뜻한 작두콩차를 한잔 마신다. 어제와 같은 출근길, 오늘은 신호에 걸렸다. 새벽 4시 44분, 골프장에 무사히 도착해 출석부에 이름을 적었다. 정수기 위에 누군가 올려놓은 믹스 커피를 뜯어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받아 반컵쯤 마셨다. 어제와는 다른 종류다. 팀 동료 한분이 ‘물통 없지?’하면서, 차 뒷좌석에서 삼다수 1.5l 페트병 하나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어제보다 혼자 해야 하는 일들이 조금 늘었다. 잔디 깎기 기계의 기어를 풀고, 시동을 걸고, 카트 뒤에 기계를 실을 수레를 달고, 수레에 기계를 올리고, 어제보다는 약간의 기술들이 필요한. 카트를 타고 1번 그린으로 향하다가 차를 중간에 세우고, 팀장님이 잔디를 맨손으로 만져본다. '이슬이 거의 없어...'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고개만 갸우뚱한다.
그린 사이사이 곶자왈에 아이스 박스를 세로로 세워둔 듯한 조형물이 있다. 뚜껑을 열었더니, 스프링클러 조작을 위한 기계 장치다. 스위치를 켜고, 관수 밸브를 열고 10초를 세고, 다시 닫는다. 그린 위로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며 물을 뿌린다.
그린에 도착해 기계를 내리고, 잔디 깎을 준비를 한다.
'니 대로 해봐.'
너 혼자 알아서 해봐라는 제주말.
멀리 하나의 물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줄(가상의 선)을 잡는다. 그 선을 따라 기계를 밀고 나아간다. 그린 가장자리에 당도한다. U턴을 해서 다시 자르려는데 방금 깎은 선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는 분명 잘 보였는데... 잔디 깎기 앞에는 아주 밝은 LED등이 달려 있어서 앞이 훤하게 보인다. 앞은 훤한데, 내가 깎은 라인이 보이지 않는다. 그 라인에 물려 다음 라인을 깎아야 하는데... 그제야 이슬이나 관수하는 것들이 이해가 간다. 매일 관리하는 잔디가 하루 만에 무럭무럭 자라 자른 곳과 자르지 않은 곳의 차이가 확연해질 리가 없다. 어제 내가 깎은 것은 잔디가 아니라 이슬이었다.
'길이 안보입니다.'
호소를 하자, 팀장님 눈에는 길이 보이는지 내 손에서 기계를 낚아채 똑바로 나아간다. 다음 그린으로.
'담배 피워?'
'네.' 담배를 하나 꺼내 문다.
'너도 펴.'
나는 담배를 가져오지 않았다.
'왜 안 펴.'
'담배가 없습니다.'
'자, 박하야.'
'네' 불을 붙여 주신다.
검은 새벽, 두 손 모은 라이터 빛만 환하다.
연기를 들이마시자, 목 뒤가 뻐근해진다.
'어제 니가 깎은 길 있지?'
'네.'
'길이 안 보이면 그 길 따라 다시 깎으면 돼.'
'아, 네...'
어제 내가 간 길이 오늘 나의 길이 된다.
작업속도가 늘었는지, 어제보다 이른 시간에 일이 끝났다. 식당으로 향한다. 머릿 속엔 벌써 메뉴 생각이다.
팀원들이 길이 안 보여서 깎기 힘들지 않았냐고 묻는다. 이런 날이 많지는 않다는 위로와 함께.
'빨리 와, 춥다.'
'네'
3월 초순이지만, 오늘은 어제보다 기온도 많이 떨어졌고, 바람도 심했다. 사람들은 잘 모른다. 제주의 날씨가 얼마나 험상궂은 지.
'견습땐 일당 없다.'
'네'
'근데 올려 줬다.'
'고맙습니다.'
직원 식당으로 향하는 동안, 팀장님과 나누는 짧은 대화가 나는 왠지 좋다.
'너, 그거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면 돈은 잘 주냐?'
'잘 줄 때도 있고, 잘 안 줄 때도 있습니다.'
'그거 하면서 먹고살아져? 힘들지?'
'잘 안 먹고살아집니다.'
'그럼 포기해.'
'허허'
'저 금능 어디 미깡밭(귤밭) 하나 빌려서 농사짓고 먹고살면 되지.'
'허허...'
오늘도 밥이 맛있다. 노동이 반찬(?). 어제 생선가스와 비교했을 때는 평이한 메뉴. 감자볶음과 계란 프라이, 순두부찌개. 팀장님은 식사를 마치고, 어제처럼 안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낸 뒤, 습관처럼 약을 입에 털어 넣는다. 혈압약일까?
'내일은 쉬고, 다음날 보자.'
'네.'
'근데 너 카톡 안 뜨더라.'
'네, 카톡 안 합니다.'
'암튼, 그래 얼른 들어가.'
'네.'
골프장 정문을 나서는 퇴근길, 시계를 보니 아침 8시 반. 나는 퇴근하고, 사람들은 골프를 치러 온다.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었다. 오랜만에 5만원 어치를 넣었다. 5만원 이상 넣어야 주는 세차권도 챙겼다. 마음이 든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