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 소개를 해둔다. '나'라는 사람보다 '싱어송라이터'라는 말 자체가 더 흔해진, 나는 싱어송라이터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사람. 요즘은 그냥 '음악가'라는 직업으로 나를 소개한다. 직업이라면 응당 생계를 뒷받침해줘야 할 텐데, 내 직업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생계를 위해 음악 아닌 일들을 여럿 해왔다. 이 이야기는 그 여럿 중 하나다.
새벽 4시로 알람을 맞춰놓고 밤 9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요즘은 자기 전에 침대 맡 핸드폰 거치대에 폰을 걸어 놓고, 두 손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ott로 영화를 본다. 톰 행크스와 덴젤 워싱턴 주연의 필라델피아를 보다 잠든다. 잠은 생각보다 쉽사리 들었으나,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깨며 시간을 확인했다. 기억나지 않는 꿈을 두 개쯤 꾸었고, 라면을 저녁으로 먹어서인지 자는 동안 속이 쓰렸다.
이를 닦고, 찬물 세수를 하고, 옷가지를 챙겨 입고, 출근길에 들을 CD도 챙겼다. 첫 출근길에는 고민의 여지없이 바흐다. 바흐 평균율 리히터 연주. 골프장 정문에 4시 반쯤 도착했다. 10분 뒤 차 두대가 내 옆을 지나갔고, 그다음 차(벤형 택시)가 '빵' 하고 내 옆에 잠시 멈췄다가 지나간다. 나는 눈치껏 그 차를 따라갔고, 직원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려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벤형 택시에서 내린 사람이 내쪽으로 걸어오며 어둠 속에서 손을 내민다.
곧, 차들이 주차장을 채운다. 각자의 자리가 정해져 있는 듯하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나를 향해 하나둘 손을 내민다. 농사꾼의 손, 건설현장의 손보다는 거칠지 않다. 그리고, 어느 틈에 내손에는 믹스커피와 종이컵이 들려 있다. 그렇지 역시 고카페인으로 새벽을 열어야지. 내가 선생님으로 부르는 팀장님(잔디 깎기 17년 차)의 지도에 따라, 골프장 내 이동차(정식 명칭은 아직 모르겠다)의 조수석에 앉았다. 팀장님은 재빠른 손길로 잔디 깎기 기계를 차 뒤에 연결했고, 우리는 1번 그린으로 이동했다.
'골프 좀 쳐요?'
'전혀 못 칩니다.'
'치면 일하는데 좀 도움 돼요.'
'네...'
어쨌든, 깃발이 꽂혀 있는 그린의 잔디를 고르고 이쁘고 나란하게 깎는 것이 내 일이다. 그런데 이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그린 군데군데에 수많은 언덕들이 숨어 있고, 기계가 몸이 끌려다닐 정도로 무겁다.
기계 앞에 달린 직사각형 모양의 검은 바가지 양 끝단에는 흰 직선이 그려져 있다. 그 선을 기준으로 잔디를 깎아나가면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턴. 앞으로 끝까지 나갔다면 당연히 모퉁이에서는 u턴을 해야 한다. 이때 원을 최대한 적게 그리면서 손의 스냅을 이용해 기계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진땀을 뺀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다행이다.
'여태껏 본 초보 중에는 제일 잘하는데?'
재능을 발견했다.
나에게 할당된 건 1,2,5,8,9 그린. 팀원 한 사람당 다섯 개의 그린을 깎으면 일이 끝난다. 한 그린당 약 25분에서 30분 소요. 나는 초보라 그보다 더 시간이 걸렸고, 9번 그린에서는 동료들이 합류해서 일을 같이 마무리했다. 일을 끝마치자, 속옷이 다 젖어 있었다.
팀원들이 기계를 제자리에 놓는 걸 눈치껏 돕는다. 잔디가 담긴 바구니와 기계 전체를 물로 헹구고, 물청소가 끝난 기계에 공기총으로 물기를 제거하고, 연료까지 넣으면 마무리. 다른 팀원이 말을 건다.
'몇 살이에요?'
'41살입니다.'
'막내네'
'네...'
팀장님이 사무실에서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허리띠가 배 아래 걸려 있는 관리직 직원에게 얼굴 도장을 찍는다.
'밥 먹고 가, 오늘 이거 말고 뭐 더 없잖아?'
'네...'
'제주에서 8년?'
'네..'
'8년 동안 뭐 했어?'
'그냥 이것저것...'
'백수네?'
'네...'
직원 식당으로 갔다. 깍두기, 봄동 김치, 브로콜리 크래미 샐러드, 생선가스, 고사리 육개장. 밥과 반찬이 훌륭하다. 국이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라고 있는데, 벽걸이 TV에서 손흥민이 99번째 골을 넣는 장면이 나온다.
'내일은 집에서 씻을 거 챙겨 오든가?'
'퇴근해서 씻으면 됩니다.'
'아무튼 내일 봐. 내일 안 나오는 거 아니지?'
'꼭 나오겠습니다.'
'그만둔다 해도 1년은 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퇴직금도 받지.'
'네'
무심하지만, 푸근한 올드보이들의 세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