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
퇴근하고 씻고, 글을 쓰고, 두 시간 정도 쉰다. 잠이 들면 다행이지만, 나는 체질적으로 해가 있으면 잠을 못 잔다. 노인도 아닌데, 늦잠이 없다. 그래서 이 일이 내게 적격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려되는 것은 내가 제일 좋아하고, 창의적이라고 생각하는 아침 시간을 고스란히 써버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점심은 앤드유에서 먹었다. 혜경은 식사가 끝나갈 때즈음 귤 착즙 주스를 내왔다. 손이 큰 혜경이라 주스의 양이 상당해서 다 마시고 나니 배가 불렀다. 문득, 주스에 귤이 몇 개쯤 들어갔을까가 궁금해졌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하루에 3개 이상 귤을 까먹은 적이 없다. 옹포리를 산책하다, H의 꽃가게에서 꽃을 몇 번 사갔다는 무한의 서에 갔다. 책장에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무한으로 시작하는 제목의 책과 페르난도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찾아 둘을 이어 부쳤다. 커피는 2/3쯤 마시고 카페를 나섰다. 내 커피 치사량이다.
'돈 버니까 마음이 편하다.' 나의 독백에
'바람직한 벌이네요.' H가 답했다.
요즘 하도 JMS jms 해서 별로 보고 싶진 않았지만, 넷플릭스를 켰다. 나는 최무비의 아이디를 빌려 넷플릭스를 본다. 왓챠는 직접 결제로 보고. OTT는 헬스장 일 년 회원권정도로 무용한 것은 아니겠으나, 아무튼 적어도 한 달에 3편 정도는 봐야 돈을 날린 느낌이 안 든다. 쉬는 날이나 주말에는 어김없이 영화를 본다. 최무비의 시청기록에 '나는 신이다'가 있다. 1화를 켰다. 잠시 후 카톡이 왔다. '예지합니다.' 일터로부터 온 카톡. 예지?
답을 안 했더니, 몇 분 지나서 팀장님 전화가 왔다.
'차안주나 뭐 하냐?'
'저녁 먹을 준비합니다.' 마침 쌀을 씻은 참이었다.
'내일 출근한다.'
'네.'
다시 '나는 신이다'를 본다. 문자 알림이 뜬다. 제주 SBS의 섭외 문자다.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멤버 중 한 명이 사회를 보는 음악프로, 노래를 3곡 정도 부르고, 토크를 하면 된다. 촬영은 5월 초. 아직 기획 단계. 작가와 통화를 하고, 나가겠다고 했다. 나는 보통 뭐든 하루 정도 고민한다. 공연 섭외든 방송 섭외든. 잔디를 깎아서 그런지 고민이 줄었다. 그나저나 내일 출근 안 하는 줄 알고 커피를 마셨는데, 잠이 걱정이다.
독서 1시간, 기타 연습 1시간, 피아노와 현대음악이론 1시간. 잔디 깎는 일을 하면서 직업 음악가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한 매일 최소한의 시간 투자다. 말 그대로 최소한이고, 이보다 더 많아지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일을 하지 않을 때랑 몇 시간 차이 나는 것 같지도 않고...
생각보다 잘 자고, 4시에 재깍 일어났다. 이불을 박차는데 3분 정도 시간이 걸린 것 빼면 나쁘지 않았다. 사과 1/4조각, 대추차 한잔. 시동을 걸고, 바흐를 틀고, 오늘은 출근길 방향을 협재 쪽으로 잡았다. 신호등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 도착 시간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가장 먼저 출근해서, 아침은 먹지 않고, 가장 먼저 퇴근하는 동료분이 믹스 커피를 저으면서 윤석렬 X새끼라고 욕을 한다. 본인 일본 친구를 무슨 낯으로 보냐면서. 출근하는 동료들 모두를 붙잡고 한 마디씩 한다. 강제징용, 반도체, 독도 문제에 대해서. 동료들의 반응은 덜 깬 잠처럼 뜨뜨미지근 하다. 얼리 어댑터 형님이 한마디 한다.
'언제 안 그런 적 있어.'
그리고, 내 전화번호를 물어본다.
'원근이라고 저장해라.'
원근 형님.
'오늘까지 만이다' 하고 팀장님이 내 뒤를 따라온다. 1번 그린을 무사히 깎고, 기계를 싣다가 반클러치 조절을 잘못해서, 기계가 추레라 밖으로 이탈했다. 다행히 날을 접어놓은 상태라 기계에는 이상이 없었다. 팀장님은 묵묵히 기계를 조작해 원위치시킨다.
'날 빼놨네, 잘했다.'
혼자서는 수월하게 되는 일들이 남이 지켜보면 잘 안될 때가 있다. 연주나 노래도 그렇다. 사실 관객들은 나의 최고 연주나 노래는 늘 놓치는 셈이다. 그건 혼자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매일 연습하는 것이다.
2번, 5번 그린을 깎고, 기계를 실을 때 한결 더 조심한다. 몸을 기계에 부치고, 천천히 기계를 싣는다. 팀장님은 다른 동료를 도와주러 가신다. 나는 혼자 8번 그린을 깎는다. 5번에서 8번 그린으로 향하는 길이 가장 길다. 그 길을 카트를 타고 이동하면 재밌다는 생각이 든다. 카트라이더...
카트 주차를 하고, 트레일러를 빼고, 잔디 깎기와 바가지를 씻고, 기름을 넣는다. 이제 기름도 내가 받는다. 직원 사무실 한쪽에는 주유구가 두 개인 작은 주유소가 있다. 거기 리터와 이름을 적고 기름을 받는다. 꼴꼴꼴. 주유건을 플라스틱 기름통에 꽂고 7L를 받는다. 그린모어팀 전찬준.
밥을 먹으러 간다.
'월요일부턴 혼자해지겠지?'(혼자 할 수 있겠지의 제주 방언, 수동태 느낌이다.)
'네'
'기계 싣고 내리는 거만 잘하면 된다.'
다른 동료,
'천천히 해. 급하면 문제 생긴다. 기계가 막 넘어가고 그래.'
팀장님,
'오늘 한번 넘어갔어.'
다른 동료,
'넘어가면 그 담부터 잘해진다. 나는 날도 해 먹었어.'
팀장님,
'날 그것도 해 먹으면 하나에 200만 원이야.'
나,
'...'
조식란에 이름을 적고 아침을 먹는다. 반찬을 푸고 있는데, 동료 한분이 식대의 끝으로 달려가 달걀 프라이를 부치기 시작한다. '아, 달걀은 직접 부쳐야 하는구나.' 김치, 어묵꽈리고추볶음, 김, 돼지고기김치찌개. 오늘은 평소보다 밥이 조금 더 퍼진다. 원근형님은 남은 계란 프라이 두 개를 나보고 가져가라 하고, 계속 계란을 부친다.
YTN에서 윤석렬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와 악수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나는 괜히 낯이 뜨거워진다. 외교를 쌈 쌌는지, 튀겼는지, 오므라이슨지, 돈까츠인지는 맛있게 먹었을까.
식사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
다른 동료분
'제주 온 지 얼마 됐남?'
'8년 차입니다.'
'어이쿠 오래됐네.'
팀장님,
'왜 왔어?'
다른 동료분
'강원도 끝에서 제주도까지 멀리도 왔다.'
나,
'주변 친구들이 한참 내려가기 시작해서...'
다른 동료분,
'기성이랑은 자주 연락하냐?'
팀장님,
'손님으로 갔데, 손님. 가게에.'
다른 동료,
'아, 손님, 그럼 그 소개해 준 친구는 뭐 하는데?'
나,
'카페 합니다.'
기성이 내 단골 카페에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전했고, 그 말이 내게 전해졌다.
팀장님,
'돈 많은 친구구나.'
나,
'요즘 관광객이 줄어서 다들 힘듭니다.'
팀장님,
'그래, 그럼 다음 주에 보자. 다음 주에는 안 쉬고 쭈욱 계속한다고 보믄 된다.'
'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