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
오후에 먹은 커피 탓인지 깊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새벽 4시 이불을 박차고 나와 대추차를 데운다. 사과 1/4조각과 바나나 반조각을 먹는다. 기온을 확인한다. 목토시를 챙긴다. 똑같은 아침은 없다. 무언가가 조금씩 늘 변한다. 출근할 마음엔 아직 변화가 없다. 마당에 나가 스트레칭을 하고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출석부에는 이제 내 이름이 정확히 인쇄되어 있다. 근무 시간과 내가 일할 코스를 적고, 제일 마지막 칸에 서명을 한다. 오늘은 사무실 안에 초코파이가 있었다. 동료가 하나 먹으라고 손짓을 해서, 일단 주머니에 하나를 챙겨 넣었다. 믹스 커피도 한 잔 탔다. 다 마시고 싶었으나, 그러면 일이 끝나고 집에 와서 쉴 때 정신이 너무 또랑또랑하다. 물 양을 좀 많이 해서 적당히 마시고, 9번 카트를 후진으로 뺀다. 바람이 좀 불고 기온이 어제보다 낮다. 동료들은 춥다면서 각자의 욕지기를 한다. 추레라(트레일러)를 달고, 걸쇠를 걸고, 잔디 깎는 기계에 시동을 걸어 추레라에 올리면, 작업 준비 끝. 오늘은 팀장님이 동승하지 않고, 나 혼자 1번 그린을 찾아갔다. 전날 지도를 통해 어느 정도 익혀둔 터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린의 반을 갈라 줄을 잡고, 팀장님과 내가 반반씩 잘랐다. 2,5번 그린도 마찬가지. 5번 그린이 끝나자, 팀장님은 다른 동료들을 도와주러 갈 테니, 나머지 8,9번 그린은 혼자 깎으라고 한다. 8번 코스를 가는 길에 갈림길이 많아서 약간 버벅거렸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길도 밝아져 혼자 찾아갈 수 있었다. 감독관이 없는 상태라 마음이 약간 누그러졌는지, 집중력이 떨어지고, 줄이 자주 비뚤거린다. 마음을 다잡고, 속으로 '일정하고 바르게!'를 반복한다.
내 일이 너무 빨리 끝나 버렸다. 9번 그린 하나 남기고 시계를 보니 아직 아침 7시 전. 9번 그린에 먼저 도착해 있던 팀장님은 본인이 깎은 면적 외의 나머지를 마무리하면, 들어가서 기계 정리를 하고 있으라고 하고 다른 그린으로 갔다. 해가 뜨고 있다. 빛 때문인지 오히려 해가 뜨면 길이 잘 안 보인다. 어둠이 길이라니… 이제는 길이 안 보여도, 내가 오간 두 길들의 음영과 간격을 확인하면서 깎는 요령이 생겼다.
카트 주차장에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작업 시작의 반대 순서로 정리를 하고, 잔디 깎는 기계에 기름까지 충전하고, 다른 동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일들이 빠르게 손에 익었다. 나는 말투가 느릴 뿐, 성격은 오히려 급한 편에 속한다.
식당 가는 길에 골프장 일꾼들을 꽤 많이 지나친다. 복장도 조금씩 다르고, 각자 뭔가 하는 일이 있어 보인다.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알 순 없지만... 20대 초반, 버스를 타고 종로를 지날 때면, 거리의 수많은 간판을 보며 위안을 삼았다. 저렇게 가게가 많은데 나 하나 취직해서 먹고살 걱정은 없겠지 하고.
오늘도 밥이 맛있다. 시장보다 노동이 오히려 더 좋은 반찬인 것 같다. 오늘의 반찬은 깍두기, 도토리묵, 샐러드, 불고기, 콩나물 김칫국이었다. 머릿속에 메뉴들이 빠짐없이 기억되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메뉴를 외우려고 노력한 것도 아닌데... 식당 TV에서는 이재명과 김기현이 손을 잡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동료들의 식판을 본다. 나 말고 다들 불고기를 수북이 펐다. 나도 좀 그럴걸…
밥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커피 이야기가 나왔다. 동료의 집에 누군가 믹스 커피 한 박스를 갔다 줬는데, 그걸 골프장 안 가져오고, 옆집 미용실에 줬다고 다들 핀잔이다. 직원 사무실 앞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누다가 누군가 나한테 커피 한잔하고 가라고 했는데, 얼리어댑터 형님이
'방송 못 봤어? 얘는 드립커피 밖에 안 마시잖아.'
'드림커피?'
'아니, 그 가루 이렇게 갈아서 물로 내려 먹는 거?'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또 서로 이야기가 오간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는다.
팀장님,
'내일은 쉰다. 넌 주말도 쉬지?'
'네.'
'쭉 하면 좋은데... 나올 수 있음 전화해 돈 벌어야지.'
'네.'
'월요일엔 무조건 나와야 된다.'
'네.'
하긴 일이란 게 주욱하면 어떤 관성과 속도로 계속하게 되지만, 3일 정도 쉬면, 또 마음이 바뀔 여지가 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 나는 당분간, 아니 꽤 오래 이슬깎기소년으로 살 생각이다. 아무튼, 주말엔 공연이 있다. 퇴근하고 씻고 차를 한 잔 마시며 골프장의 자그마한 사건들을 기록하는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오늘은 씻고 바로 자고 싶었지만, 의지적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쨌든, 뭐라도 쓰고 볼 일이다. 일정하고 바르게!
잔디 깎는 기계의 속도 조절 장치. 자세히 보니 빠른 것은 토끼요 느린 것은 거북이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