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퇴근해서 씻고 뜨끈한 대추차 한잔을 우리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직 아홉 시 반밖에 안 됐다.
어젯밤에는 엄마가 전화가 왔다. 일교차에 감기가 걸렸는지, 쉰 목소리로.
'잔디 깎는 일은 할만하니?'
'네, 좋아요.'
'그래 항상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네.'
엄마는 아침 일찍 아파트 계단 청소를 하러 출근하고, 더 일찍 새벽기도를 하러 간다. 요즘은 내가 고정적인 수입이 있으면 좋겠다고 기도한다고. 엄마보다 더 일찍 나가는 일을 구해서 마음이 가볍다.
4시 알람. 아홉 시에 잠자리에 들어 두어 번 깼다. 기온이 좀 풀렸다. 작업복을 챙겨 입고, 대추차 주전자에 불을 올리고, 바나나 반조각을 잘라먹었다. 고요한 아침 시간. 리히터 연주의 바흐 두 번째 CD.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의 13번째 프렐류드와 푸가를 들으며 출근한다. 정문에서 직원 사무실까지 걸리는 시간을 재본다. 2분. 짧은 푸가 한곡 감상하기에는 충분한 시간.
오늘은 내 할당 카트가 생겼다. 차번호는 9번.
동료분이 팀장님에게 놀란 눈을 하고,
'벌써 카트를 준다고?'라고 말했다. 나도 놀랐다.
카트 충전기를 빼고, 좌석을 위로 올려 배터리를 켜고, 시동을 걸고, 라이트를 켠다.
딱히 알려주는 건 없다. 액셀과 브레이크를 적절히 밟아 카트를 몰았다.
골프장 이동로의 중앙선, 그걸 중심에 놓고 카트를 몰면 된다. 그린과 티 사이의 길들은 넓지 않고, 내 카트 뒤에는 추레라와 잔디 깎는 기계가 달려 있으니, 한쪽으로 쏠려 달리면 커브에서 뒤가 길의 경계에 닿을 것이다. 조심히 운전을 해 1번 그린에 도착한다. 아직 내 담당 그린까지 가는 길을 완전히 익히진 못했다.
어제는 휴무였다. 하루를 쉬니, 몸의 뻐근하던 곳들도 좀 풀리고, 기계가 가벼워진 느낌이다. 지난번보다 라인과 길도 좀 더 잘 보인다. 엊그제 깎았던 길과 교차해서 깎는다. 기계의 속도 조작도 익숙해졌고, 턴도 좀 더 부드러워졌다. 팀장님이 지켜보면서 아무 말도 없으시고, 담배를 물거나, 스쿼트를 하고 있으면 내가 제대로 깎고 있는 거다. 오늘은 평소보다 잔디 깎기 날 주위에 흙이 많이 모였다. 다들 그걸 똥이라고 한다. 자전거 체인과 체인링에 끼는 때도 똥이라고 한다. 아무튼 똥은 기계를 바닥에 놓고 갈지자로 끌어주며 제거한다. 2번 그린으로 이동.
'좀 쉬면서 물도 먹고 담배도 피우고 있어라. 나 좀 깎을게.'
'네'
담배에 불을 붙인다. 주변이 밝아 오고 있다. 올려다본 하늘의 구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골프장이란 건 정말 아름다운 곳 한가운데에 있는 거구나. 그전에 더 아름답던 곳을 깎아내고 만든 거겠지만. 가까웠다 멀어지는 팀장님의 뒷모습이 숭고해 보인다. 몰두하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에는 어떤 숙연함 같은 게 있다. 고요한 가운데 잔디깎기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만 잔잔히 가까웠다 멀어졌다 한다. 당연한 거겠지만, 17년 차 팀장님이 자른 길은 반듯하고, 간격도 일정한 반면, 내가 자른 길은 군데군데 구불구불하고, 간격도 들쑥날쑥이다.
5번, 8번, 9번. 해가 뜨면 시선이 또 바뀌는지, 갈 때 보인 길이 올 때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뭘 깎고 있는지 깜빡하는 찰나 어김없이 팀장님의 손짓이 나를 부른다.
'멀리 봐.'
'네.'
'이제 기계가 도는 간격에는 니가 익숙해졌을 테니, 눈으로 먼저 봐.'
시선이 기계보다 그린을 먼저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선.
비슷한 예일진 모르겠지만, 어릴 적 도장에서 대련(겨루기)을 할 때, 관장님은 항상 상대의 눈을 보고 대응하라고 했다. 주먹이나 발을 보는 게 아니라 눈을 보고 움직임을 따라가라는 말이었다. 인간의 몸은 눈을 따라간다. 그래서 눈속임이라는 말이 있다.
카트를 주차하고, 식당으로 간다. 가는 길이 포근하다. 기온이 어제보다 확실히 풀렸다.
'내일 쉬고, 모레 일한다.'
'네'
'넌 주말에 못 나온다고 했지?'
'네.' 팀장님 전화가 울린다.
'네, 알겠수다.' 전화를 끊는다.
'배부른 새끼들, 나잇값도 못하는.'
누군가의 소개로 페어웨이를 깎으러 출근한 사람이 하루하고 못하겠다는 걸 알리는 전화였다.
오늘의 반찬. 김치, 미역줄기 초무침, 멸치볶음, 브로콜리 스팸 볶음, 두부감자된장국. 아침을 먹기 전에 조식란에 이름을 적는다. 허성혁. 팀장님의 이름이다. 예전에 밴드 그릇 2집 마스터링을 해준 푸른곰팡이의 엔지니어와 이름이 같다. 괜히 반갑다. 스팸 볶음을 다들 수북이 푼다. 나는 다섯 개만. 사람들마다 맛있는 반찬이 비슷하다는 게 새삼 신기하다. 고등학교 급식이나 군대와 다른 것은 이제는 스스로 반찬을 푼다는 것.
동료 중 한 분이 묻는다. 아직 동료들, 형님들, 이름을 알지 못한다.
'넌 이거 끝나면, 하는 거 읍냐?'
'네'
그때 팀장님,
'가수라니까!'
'가수?'
나를 골프장에 소개해 준 기성씨가 내 직업을 가수라고 소개했다. 나는 굳이 가수라고 소개할 마음이 없었지만...
'음반도 있냐?'
'네' 동료들이 이번에는 다 같이 놀란다.
'아, 요즘에는 그냥 혼자 음반을 만들기도 합니다.'
'아니, 가수가 왜 여기 와서 일을 하냐?'
다른 동료분,
'인지도 없으믄 힘들지. 우리 처형도 가순데, 작곡가들 제주 오면 접대하느라 힘들어.'
'너는 노래는 누가 만든 거 부르냐?'
'제가 만듭니다.'
'어 싱쏭라이터?'
'네' 매스컴이 대단하긴 하다. 형님들도 그 단어를 알고 있다.
'야, 그럼 너 유튜브에 올려.' 유튜브도 참 대단하다.
그때 얼리 어댑터 느낌이 나는 동료분,
'여기 전찬준 검색하니까 노래 많이 나와'
팀장님,
'야, 어디? 내가 들어봐야 홍보도 할거 아니냐?'
'아 저...'
'어떤 거?
'길 위에서'가 유튜브 창에 보인다. '잔디 위에서'라는 노래도 만들어야 하나.
'그래 낼은 쉬고 모레 보자. 너 카톡 뜨네.'
'네, 깔고 가입했습니다.'
'그래 들어가.'
'고생하셨습니다.'
집에 돌아와 씻으려고 옷을 벗었는데, 거울에 비친 몸의 선들이 선명해졌다. 새벽에 일어나서 3시간 정도 거의 쉼없이 걸으니 그럴 만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