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퇴근해서 씻고 습관처럼 모니터 앞에 앉았다. 습관이란 이틀만 안 해도 그 무게가 가벼워진다. 그냥 침대로 가서 눕고 싶은 마음이 30% 정도 생겼다. 결명자를 데웠다. 판매처의 권장량으로 우렸더니 너무 진했다. 나는 뭐든 좀 연하게 먹는 편이다. 내가 카페를 차린다면 연한 커피가 주 메뉴가 될 것이다.
지난 공연은 뭐랄까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래도 주최자가 가장 만족한 듯하여 더 이상 의심을 품지 않기로 했다. 뒤풀이 자리에서도 샴페인 한잔을 다 못 마시고 일찍 일어섰다. 새벽 4시 알람. 으악 소리를 내면서 눈을 떴다. 3분 정도 이불을 박차는 시간이 걸렸고. 세수를 하고, 결명자를 데우고, 사과 1/4조각을 먹었다. 시간 말고는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사실 한결같은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러 결이 있고, 그중 어떤 결이 다른 결에 비해 조금 두드러질 뿐이다.
카오디오의 CD가 먹통이다. 인식을 못한다. 게다가 CD를 먹은 채 뱉어 내질 않는다. 젠장. aux에 핸드폰을 연결해서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을 튼다. 출근길이 슬퍼진다. 역시 아침을 여는 출근길에는 바흐가 좋다.
오늘도 믹스 커피 반잔. 사실, 믹스커피는 내가 어디서 찾아 먹는 게 아니고, 동료분이 늘 하나씩 먹으라고 챙겨 주신다. 나는 거절을 잘 못한다. 게다가 믹스커피를 마시면 잠도 달아나고, 입도 달콤하고. 그래도, 좀 시간이 지나면 텀블러를 챙겨 갈 생각이다. 오늘 출근길 다른 편에는 속도단속장비가 새로 생겼는지, 그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하긴, 속도위반 딱지 하나면 일당의 절반 이상이 고스란히 날아간다. 네비가 없는 나는 항상 속도를 확인하며 달린다.
오늘부터는 혼자다. 그래도 일이 그 새 몸에 익었는지, 모든 게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된다. 몸의 기억. 인간의 습득 능력은 참 신기하다. 나는 악기를 연습할 때면 그걸 좀 더 절실히 느낀다. 지금 안 되는 것이 연습하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된다. 말 그대로 저절로. 거창하게 말하면, 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잠든 사이에. 나는 잔디 깎기를 이제 좀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고, 카트 운전도 마찬가지다. 1번 그린을 반쯤 깎는데 시동이 꺼진 채 걸리지 않는다. 옆 그린에서 작업을 하던 팀장님이 전화가 온다.
'왜 그래?'
'시동이 안 걸립니다. 스위치도 온 상태고, 기어나, 날도 다 만져 봤습니다.'
팀장님이 넘어온다. 문제는 초크다. 내가 건들지도 않은 초크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 있다. 나도 초크가 정확히 뭔지는 모른다. 오늘 처음 본 거니까. 매일 작은 배움과 어려움에 맞닥뜨린다.
다섯 개의 그린을 혼자 깎았다. 마지막 그린 작업 막바지에 동료 형님 두 분이 내 쪽으로 와서 일을 마무리하게 도와준다. 뭔가 든든하다. 그래도 빨리 잘랐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팀장님이 오시더니, 간격 잘 잡아라,라고 했다. 이제 기온이 올라가고, 건조해지면, 이슬이 보이지 않을 테니, 자신이 자른 간격에 의지해 잘라야 할 시기가 오는 것이다. 그전에 많이 익숙해져야 한다.
김치, 브로콜리 삶은 것과 초장, 치킨너겟, 닭곰탕, 계란 프라이. 오늘은 식판 위에 닭이 많이 올라왔다. 밥을 먹고 있는데, 얼굴이 불그스름하고, 쌍꺼풀이 부담스러운 노신사가 우리 테이블 쪽으로 인사를 한다. 나도 꾸벅.
'새로 온 분인가 보네.'
우리 팀원들 끄덕.
밥을 다 먹고 나오는데, 식당 옆 자판기에 사이다 값이 2,000원이다.
동료 '사이다가 2,000원. 물가 많이 올랐다. 소주도 6,000원 이래.'
'술 좋아하냐?'
'가끔 먹습니다.'
'이 일 하면 술 먹을 일 적어진다.'
'네.'
사실 일을 시작하고 술을 거의 안 마셨다. 죽었던 새끼발톱이 다시 자라기 시작한다. 그냥 느낌이려나.
팀장님 '4월 11,12,13 나 입원한다. 쉴 생각하지 마라.'
'네.'
동료 '수술하고 다음날 일하기 괜찮겠수까?'
팀장님 '저번에 집어넣은 거 빼는 건데 뭐.'
'아까 인사한 사람 있지. 홍전무라고, 일하는 사람들 중 여기 대빵이라. 인사 잘해.'
'홍전무… 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홍매화가 발그레하게 피어 있다.
동료 ' 꽃 피었네.'
팀장님 '이제 쭉 필거라.'
'들어가라. 뜨근하게 샤워하고 가든지.'
'뭘 안 챙겨 와서.'
'천천히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