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스티븐 킹의 소설 한 권(고도에서)을 다 읽고, 다음 책(아웃사이더)으로 넘어갔다. 살인 사건을 읽다,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12시쯤 깨서 아직 4시간을 더 잘 수 있구나 하고 안도했다. 마치 고등학교 수험생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아직 좀 더 잘 수 있어...
새벽 기온이 많이 올랐다. 아침에 일어나도 집안이 춥지 않다. 사과 1/4조각, 땅콩 한 줌, 옥수수차. 다이어트 식단 같다. 그렇게 1차 아침을 해결하고, 아직 어두운 마당에 나가 스트레칭을 한다. 4시 20분 집에서 출발. 자동차 기름 계기판의 칸이 생각보다 빨리 사라진다. 카오디오는 여전히 CD를 뱉어 내지 못한다. 당분간 좋든 싫든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2권의 12개의 프렐류드와 푸가를 들으며 출근해야 한다.
배를 두르고 있던 군살들이 점점 사라진다. 몸이 좀 가벼워진 느낌이다. 오늘은 귀마개와 텀블러를 챙겨갔다. 형님들은 다들 삼다수 플라스틱 병이다. 나는 괜히 뒷짐을 져 텀블러를 뒤로 가게 한다. 귀마개를 끼고 잔디를 깎으니 한결 낫다. 귀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모터 소리가 아주 부드럽게 들린다. 차음이 잘 되는 큰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이슬이 많아 작업이 수월했다.
5개의 그린을 거의 혼자 다 깎고 나머지 9번 그린의 1/5 정도를 원근 형님이 도와주셨다. 기계를 정리하고, 다시 원근형님의 카트를 타고, Do not enter라는 푯말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더니, 연습 그린이 있었고, 새 잔디 깎기 기계를 시험 운행 중이었다. 팀장님이 어딘가 비장한 표정으로 '내일부터, 새 기계로 잘라야 한다'고 했다. 새 기계라 그런지 번쩍번쩍 광이 났고, 어딘가 거만한 느낌이 들었다. 기존의 기계가 다소곳한 노루 같았다면, 새 기계는 펄쩍펄쩍 뛰는 톰슨가젤 같다. 이제 좀 적응할까 싶었는데, 또 도구를 바꿔야 한다니, 아쉬웠다.
동료 :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지?'
나 : '네'
동료 : '적응되믄 괜찮아.'
오늘도 밥이 맛있다. 밥은 좀 적게 퍼서 모자란 듯 먹어야 더 맛있다. 나는 그렇다. 김치, 무채나물, 감귤 샐러드와 레몬드레싱, 불고기, 어묵국. 동료들의 식판에는 불고기가 수북이 쌓여있다. 나는 적당히. 잔디를 깎고부터 욕망이나 욕구들이 좀 사라진 것 같다. 성욕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식욕이 붙진 않았다. 담배나 술에 대한 욕구도 거의 없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팀장님 : '그... 일하고 싶다는 친구는 육지것?'
나 : '네, 육지 사람입니다.'
제주도는 육지것과 괸당이 엄연히 구분되어 있는 사회다. 지방들은 그 나름대로의 지방색을 가지고 있다. 나도 어렸을 때, 아버지나 삼촌들이 다른 지방 번호판을 달고 다니는 차에게는 좀 더 호전적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육지것과 괸당을 구분하기는 아주 쉽다. 일단 제주 사람들은 처음 만난 사람에게 제주말을 던진다. 그리고 돌아오는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팀장님 : '오늘은 혼자 5개 다 깎았냐?'
나 : '마지막 것만 원근형님이 좀 도와주셨습니다.'
다섯 개 전부를 나 혼자 해내야 나도 한 사람 몫을 하는 건데...
팀장님 : '너 담배 안 피냐?'
나 : '핍니다.'
팀장님 : '피는 모습을 잘 못 본 것 같은데...'
나 : '안 가져왔습니다.'
원근 형님이 담배 하나를 건넨다. 디스 플러스. 디스 플러스를 보면 고등학교 야자시간과 신선생님이 떠오른다. 나는 강원도 강릉 출신이다. 우리 고등학교는 해송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야지시간의 쉬는 시간 해송 아래 여기저기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불이 난 건 아니었다. 아마, 모두들 마음속에 뜨거운 불 하나씩은 품고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전남 부안에서 나무작업을 하시는 신선생님도 언제나 디스플러스를 고집하셨다. 이제는 연세도 있고, 폐건강도 안좋아지셔서 얼마전에 레종으로 갈아타셨다...
식후땡을 하고, 형님들이랑 소소한 수다를 떨다, 퇴근했다. 집에 와서 샤워를 하는데, 이상하게 몸에 쑤신 곳 하나 없었다. 벌써 적응해 버렸나...
오후에는 클래식 수업이 있다. 말러의 아다지에토 분석을 마무리할 것이며, 비음열주의 무조음악에 대해 배울 것이다. 나는 직업이 몇 개인가. 참 현대적인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