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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준 Oct 16. 2024

실수

3.25

 저녁 여섯 시 반쯤 윤아에게서 문자가 왔다. 묵음 1주년 기념을 조촐히  예정인데 저녁에 시간이 되냐고. 9시까지는 괜찮다고 했다. 저녁은 있는데, 밤은 없는 삶이 되었다. 벌써 일 년. 시간은 언제나 빠르다. 묵음의 오픈일과 3 디자이너 진이의 양수가 터진 날이 같다. 3.23. 진이는 하늘이의 생일이고, 일 년이 지났다고 편지와 이자람의 수필집을 보내왔다. 나도 비로소 벌써 일 년이 지났네라고 실감했다. 간단하게 와인 두 잔을 마시고, 9 반이 약간 넘어서 집에 와서 바로 잤다. 소설을 너무 읽어서일까, 살인마가 갑자기  침대 옆에 누워 있을  같아 약간 몸을 떨다 잠들었다.

아침이 힘들다. 역시 전날 저녁 약속은 다음날 컨디션에 영향을 많이 준다. 강박적으로 괜찮은 컨디션으로 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결명자 한잔, 바나나 한 개. 텀블러와 귀마개를 챙기고 차키를 챙긴다. 스트레칭하는 걸 잊어버렸다.

오늘은 믹스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정신이 약간 멍하다. 새 기계를 사용해야 한다. 새 기계에는 번호가 적혀 있고, 나이순으로 자기 기계를 골라 잡았다. 나는 7번. 숫자 7과 8을 좋아한다. 1번 그린에 5시 10분 도착, 2번 그린에 다섯 시 5시 45분에 도착, 5번 그린에 6시 20분쯤 도착. 속도가 나쁘지 않다. 어떻게든 나 혼자 내 몫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발 빠르게 움직여 본다. 8번 그린에 도착해 잔디를 깎으려는데 내가 깎은 줄 밖으로 얇은 줄 2줄이 생기고, 갑자기 기계가 높아진 것 같다. '아, 왜 하필...' 성혁형이 옆에 줄이 생기면 뭔가 잘못된 거니 연락하라는 말이 생각난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원근형에게 전화를 한다. 날에 나뭇가지가 끼었는지 확인하란다. 이상 없다. 곧 원근형이 왔고, 성혁형의 전화가 왔다. 원근형은 기계 바꿔가지고 오라는 올더를 내린다. 나는 기계를 바꾸러 가다가, 그래도 성혁형한테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전화를 한다. 잠깐 기다리란다. 성혁형이 와서 기계를 체크하고, 잔디를 깎는다. 이상 없다. 내가 다시 기계를 잡는다. 제대로 된 느낌이 난다. 나는 이상하다를 연발한다.

"너 바퀴 끼고 잔디 깎았잖아."

나는 그제야 양 옆으로 난 두 줄이 바퀴자국임을 깨닫는다. 잔디 깎기 기계에는 이동을 위해 탈착식 바퀴가 달려있고, 잔디를 깎기 전에는 바퀴를 항상 빼야 한다. 다 깎으면 다시 끼워야 하고. 뭐가 급했는지, 아니면 정신이 어디가 있었는지.

"찬준아, 잡생각 하지 말고, 그린 위에서는 집중해라."

"네."

실수를 한 날도 밥은 짓궂게도 맛있다. 김치, 숙주무침, 코다리 조림, 미역국, 계란 프라이. 남자 여섯은 아무 대화도 없이 묵묵히 밥을 먹는다. 시간이 좀 늦으면 식당에 직원들이 많다. 각자 유니폼이라든지 옷이 다 다르다. 나는 머리를 숙이고 걷는다. 자신감이 없다거나 부끄러움이 많아서는 아니고, 그냥 사람을 쳐다보지 않는 게 습관이다.

새 기계의 속도 조절계의 위치를 미케닉이 조절해 준다. 자전거 변속기처럼. 공구들과 기계가 있는 곳은 어디에나 있는 WD-40이 보인다. 총괄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며칠만 신경 써서 새 기계로 깎기를 독려한다. 아마, 골프대회가 열리는 것 같다.

밥을 다 먹고, 직원 사무실 현관의 1칸짜리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운다. 나는 피지 않는다.

성혁형 : "찬준아 너 바지 사이즈 뭐냐?"

나 : "30입니다."

성혁형 : "똥배만 나왔구나."

40대 남자가 바지 30 사이즈 입으면 똥배 나온 건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28이 딱 맞겠지만, 바지가 끼는 건 질색이다. 나는 삼각팬티조차 입지 못한다.

성혁형 : "일로와바."

탈의실로 들어간다.

성혁형과 한석형이 비닐 포장도 뜯지 않은 30,32 사이즈의 겨울과 여름 작업복 바지를 준다. 반팔 티셔츠까지. 티셔츠에는 골프장 로고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여름엔 조끼가 필수라며 조끼를 세 개쯤 준다. 첫 출근 후 14일 만이다. 나는 점점 일원이 되어간다.

오늘은 예외적으로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금오름 앞 CU. 늘 퇴근길에 리콜라 크랜베리맛을 먹으며 뭔가 상쾌함을 느꼈는데, 그게 다 떨어졌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는 테이블마다 멋없게 아무도 따르지 않을 금연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다. 탐나는 전의 잔액을 확인하고, 편의점을 털러 들어갔다. 리콜라가 없었다. 홀스 2+1을 맛 별로 사고, 호주산 초콜릿과자 한 봉지와 동서식품의 디자인만 스타벅스 모카커피도 하나 샀다.

"요기 앞에서 담배 피워도 되나요?" 안개가 낀 퇴근길 아침이다. 안 필 수가 없다.

"응, 요기 옆에서 피워요. 읍에서 나와서 금연 딱지 다 붙이고 갔잖아."

"네."

내 뒤로 관광객인지 여자들 무리가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지나간다.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적어도 다섯 명은 돼 보였다. 걸그룹...? 일단, 고카페인과 초콜릿을 섭취하고, 한 귀퉁이에 가서 담배를 문다. 차 시동 끄는 걸 잊어서 차로 가서 시동을 끄고 나오는데, 걸그룹이 단체로 나온다. 또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단체로 무단횡단을 했다. 이상하게 내 기분이 리프레쉬됐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뒤돌아서 하늘을 보며 담배 연기를 뿜었다.

실수를 통해 배운다고 했던가. 진리다.

실수를 하지 않고서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실수를 통한 배움이 더 오래간다.

작은 실수를 통해 큰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 한 게 없겠다.

그런 이들을 우리는 현명한 자라 부른다.

하지만, 실수는 두려워하지 말자.

나 말고 아칩밥을 기다리는 고양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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