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저녁 여섯 시 반쯤 윤아에게서 문자가 왔다. 묵음 1주년 기념을 조촐히 할 예정인데 저녁에 시간이 되냐고. 9시까지는 괜찮다고 했다. 저녁은 있는데, 밤은 없는 삶이 되었다. 벌써 일 년. 시간은 언제나 빠르다. 묵음의 오픈일과 3집 디자이너 진이의 양수가 터진 날이 같다. 3.23. 진이는 하늘이의 생일이고, 일 년이 지났다고 편지와 이자람의 수필집을 보내왔다. 나도 비로소 벌써 일 년이 지났네라고 실감했다. 간단하게 와인 두 잔을 마시고, 9시 반이 약간 넘어서 집에 와서 바로 잤다. 소설을 너무 읽어서일까, 살인마가 갑자기 내 침대 옆에 누워 있을 것 같아 약간 몸을 떨다 잠들었다.
아침이 힘들다. 역시 전날 저녁 약속은 다음날 컨디션에 영향을 많이 준다. 강박적으로 괜찮은 컨디션으로 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결명자 한잔, 바나나 한 개. 텀블러와 귀마개를 챙기고 차키를 챙긴다. 스트레칭하는 걸 잊어버렸다.
오늘은 믹스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정신이 약간 멍하다. 새 기계를 사용해야 한다. 새 기계에는 번호가 적혀 있고, 나이순으로 자기 기계를 골라 잡았다. 나는 7번. 숫자 7과 8을 좋아한다. 1번 그린에 5시 10분 도착, 2번 그린에 다섯 시 5시 45분에 도착, 5번 그린에 6시 20분쯤 도착. 속도가 나쁘지 않다. 어떻게든 나 혼자 내 몫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발 빠르게 움직여 본다. 8번 그린에 도착해 잔디를 깎으려는데 내가 깎은 줄 밖으로 얇은 줄 2줄이 생기고, 갑자기 기계가 높아진 것 같다. '아, 왜 하필...' 성혁형이 옆에 줄이 생기면 뭔가 잘못된 거니 연락하라는 말이 생각난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원근형에게 전화를 한다. 날에 나뭇가지가 끼었는지 확인하란다. 이상 없다. 곧 원근형이 왔고, 성혁형의 전화가 왔다. 원근형은 기계 바꿔가지고 오라는 올더를 내린다. 나는 기계를 바꾸러 가다가, 그래도 성혁형한테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전화를 한다. 잠깐 기다리란다. 성혁형이 와서 기계를 체크하고, 잔디를 깎는다. 이상 없다. 내가 다시 기계를 잡는다. 제대로 된 느낌이 난다. 나는 이상하다를 연발한다.
"너 바퀴 끼고 잔디 깎았잖아."
나는 그제야 양 옆으로 난 두 줄이 바퀴자국임을 깨닫는다. 잔디 깎기 기계에는 이동을 위해 탈착식 바퀴가 달려있고, 잔디를 깎기 전에는 바퀴를 항상 빼야 한다. 다 깎으면 다시 끼워야 하고. 뭐가 급했는지, 아니면 정신이 어디가 있었는지.
"찬준아, 잡생각 하지 말고, 그린 위에서는 집중해라."
"네."
실수를 한 날도 밥은 짓궂게도 맛있다. 김치, 숙주무침, 코다리 조림, 미역국, 계란 프라이. 남자 여섯은 아무 대화도 없이 묵묵히 밥을 먹는다. 시간이 좀 늦으면 식당에 직원들이 많다. 각자 유니폼이라든지 옷이 다 다르다. 나는 머리를 숙이고 걷는다. 자신감이 없다거나 부끄러움이 많아서는 아니고, 그냥 사람을 쳐다보지 않는 게 습관이다.
새 기계의 속도 조절계의 위치를 미케닉이 조절해 준다. 자전거 변속기처럼. 공구들과 기계가 있는 곳은 어디에나 있는 WD-40이 보인다. 총괄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며칠만 신경 써서 새 기계로 깎기를 독려한다. 아마, 골프대회가 열리는 것 같다.
밥을 다 먹고, 직원 사무실 현관의 1칸짜리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운다. 나는 피지 않는다.
성혁형 : "찬준아 너 바지 사이즈 뭐냐?"
나 : "30입니다."
성혁형 : "똥배만 나왔구나."
40대 남자가 바지 30 사이즈 입으면 똥배 나온 건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28이 딱 맞겠지만, 바지가 끼는 건 질색이다. 나는 삼각팬티조차 입지 못한다.
성혁형 : "일로와바."
탈의실로 들어간다.
성혁형과 한석형이 비닐 포장도 뜯지 않은 30,32 사이즈의 겨울과 여름 작업복 바지를 준다. 반팔 티셔츠까지. 티셔츠에는 골프장 로고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여름엔 조끼가 필수라며 조끼를 세 개쯤 준다. 첫 출근 후 14일 만이다. 나는 점점 일원이 되어간다.
오늘은 예외적으로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금오름 앞 CU. 늘 퇴근길에 리콜라 크랜베리맛을 먹으며 뭔가 상쾌함을 느꼈는데, 그게 다 떨어졌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는 테이블마다 멋없게 아무도 따르지 않을 금연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다. 탐나는 전의 잔액을 확인하고, 편의점을 털러 들어갔다. 리콜라가 없었다. 홀스 2+1을 맛 별로 사고, 호주산 초콜릿과자 한 봉지와 동서식품의 디자인만 스타벅스 모카커피도 하나 샀다.
"요기 앞에서 담배 피워도 되나요?" 안개가 낀 퇴근길 아침이다. 안 필 수가 없다.
"응, 요기 옆에서 피워요. 읍에서 나와서 금연 딱지 다 붙이고 갔잖아."
"네."
내 뒤로 관광객인지 여자들 무리가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지나간다.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적어도 다섯 명은 돼 보였다. 걸그룹...? 일단, 고카페인과 초콜릿을 섭취하고, 한 귀퉁이에 가서 담배를 문다. 차 시동 끄는 걸 잊어서 차로 가서 시동을 끄고 나오는데, 걸그룹이 단체로 나온다. 또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단체로 무단횡단을 했다. 이상하게 내 기분이 리프레쉬됐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뒤돌아서 하늘을 보며 담배 연기를 뿜었다.
실수를 통해 배운다고 했던가. 진리다.
실수를 하지 않고서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실수를 통한 배움이 더 오래간다.
작은 실수를 통해 큰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 한 게 없겠다.
그런 이들을 우리는 현명한 자라 부른다.
하지만, 실수는 두려워하지 말자.
나 말고 아칩밥을 기다리는 고양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