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예보에 다음날 비다. 그런데 쉰다는 연락이 오지 않아서, 불안한 마음으로 알람을 맞춰 놓고 잤다. 새벽 4시에도 전화가 오지 않는다. 현관을 열고 마당을 봤더니 비는 오지 않는다. 아이폰 날씨에는 비가 오는 중이고. 찬물 세수를 하고 결명자를 끓이고 양말을 신는데, 성혁형님의 이름이 전화에 뜬다. 4시 7분.
"오늘 쉰다. 골프장 나간 사람이 거긴 비 온데."
찬물 세수만 하지 않았어도...
여러 가지 마음이 머릿속에서 충돌한다. 일어난 김에 일어나라. 깨어난 김에 깨어나라. 어떤 격언에 이끌려 나는 그냥 일어나서 묵음의 에티오피아를 내린다. 그러나 커피를 한모금하고, 거울 속 충혈된 눈과 극도로 밀려오는 피로감을 떨치지 못하고, 함민복의 시집을 읽다 접는다. 이렇게 하다간 하루가 꼬이겠어. 억지로 좀 자자. 다행히 삼십 분 정도 잘 잤다. 시간은 7시.
식은 커피에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시고, 1시간 정도 스티븐 킹의 고도에서를 읽었다. 잘 읽힌다. 정신이 맑다. 아까의 피로감은 온데간데없다. 다행히(?) 슬레이트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제법 세차다.
나는 우연을 믿는 편이다. 이 소설은 골프장에 나가기 전에 명지가 선물해 준 책이다. 소설을 읽는데, 골프장 이야기가 나온다. 카트도 나오고. 괜히 반갑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전부라고 믿는 속성이 있다. 한창 와인에 빠졌을 때는 와인 산업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었고, 잔디를 깎는 지금은, 생각해 보니 별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떤 장면이 좀 반가운 정도.
오랜만에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온 H에게 커피를 내려주고, 아침으로 샐러드를 같이 먹었다. 이제야 휴일 느낌이 좀 난다. 어디라도 좀 다녀야 하는데, 비 오는 날이 휴일이다. 아버지도 비 오는 날에만 쉬었었다. 어떤 식으로든 나이가 들면서 자식들은 부모를 이해하게 되고, 더 자주 상기하게 된다. 실제로 볼 수 없게 되면 더 그렇다.
골프장에 나가지 않는데도, 성혁형님이 하던 소리가 떠오른다. 그린은 전체적으로 타원형, 경계선은 곡선. 직선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내부를 깎지만, 결국엔 이발을 바리깡으로 마무리하듯, 둘레를 돌면서 마무리해야 한다. 이때 그린의 가장자리(칼라)의 길이가 다른 잔디를 어쩔 수 없이 좀 깎게 되거나, 반대로 그린과 칼라 사이의 간격이 생기기도 한다.
"바짝 깎아보기도 하고, 좀 간격이 생기게도 깎아봐. 감각이라는 게 그래야 생겨."
내가 어떤 곡을 만들어놓고 키를 정할 때 하는 방법과 유사하다. 그 곡이 내 목소리에 맞는지 키를 왔다 갔다 반키, 한키 위아래 조절해 가며, 결국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감을 찾아낸다. 운 좋아 한번에 딱 들어맞는 경우도 있지만, 또 맞다고 생각하던 키가 어느 날은 어색하게 들려, 심하게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다. 자꾸 해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