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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수 Mar 08. 2024

웬만해서는 남을 평하지 말아라

(부제; 쉽사리 사람을 속단하지도, 평하지도 말아라!)


 우리가 다양한 사회 활동을 내 나가면서, 여러 관계로 알게 된 타인들을 이래저래 평하는 일이 많을 수 있다.

 때로 그 사람이 이러이러해서 매우 나쁘다고 평한다.

 때로는, 그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많다는 식으로 비판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 아주 편협된 정보를 가지고 뒷담화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정도라면, 그나마 좀 나은 편이다.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서는, 그나마 자기 양심의 가책을 조금은 느끼게 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이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타인에 대해 매우 단적이고 심각한 평가를 마구 쏟아내기도 하고, 또 그런 평가를 이리저리 주변으로 퍼뜨리면서도, 자신의 평가가 아주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심지어 자기 말을 듣는 상대에게는 자신이 아주 공정한 잣대로 말하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제삼자를 평가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는, 양심의 가책은커녕, 전혀 문제의식을 제대로 못 가지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즉, 이렇게 스스로 자기주장을 비판이나 흉이 아닌 아주 객관적이고 정당한 평가로 본인 스스로도 인식하면서, 또 거기에 좀 더 포장을 해 가면서 남에 대해 정확하지 않은 평가를 마구 흘리는 것은 더욱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우리가 흔히 많이 인용하는 속담 중에서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이 있듯이, 타인에 대한 평가는 그리 쉽지도 않고, 그리 단적이거나 단조로울 수가 없다.

 보는 사람이 생각하는 각도나 성향에 따라서, 그 평가가 매우 달라질 수 있으며, 여기에 오해까지 더해지는 경우라면, 그 정확성 혹은 정당성은 엄청나게 문제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이러한 심리 분야의 전문가들조차도, 사람을 평하는 것은 쉽지가 않아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주 여러 단서를 붙여 가며, 아주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만 평하려 한다.     


 특히나, 이 세상 그 누구도 아주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로 존중받아야 할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마구 ‘평(評)’이라고 하는 아주 작은 울타리에 너무나도 쉽게 가두어 버리게 되면, 이는 엄청난 오류와 착각의 시발점이 될 수 있고, 그래서 대인관계에서 여러 불협화음을 초래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개인의 인품이나 성격을, 사회적으로 주변 사람들이 마구 함부로 말하고, 멋대로 규정짓고, 마구 퍼뜨려 나간다는 것은, 때로 그 사람에 대해 아주 큰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웬만해서는 남을 평하지 말아라!”(그림;.bing.com/images)



 그러니, 자신은 아주 객관적이고 공정하다면서 타인에 대한 평가를, 아주 단적인 표현을 많이 써 가며, 마구 쏟아내고 퍼뜨린다면, 이는 말도 안 되는 행태인 것이다.

 나중에, 자신이 좀 지나친 평가를 했다며, 혹은 다소 오해가 있었다며, 매우 미안해 할 수도 있겠으나, 이미 큰 상처를 받았거나, 직간접적으로 큰 손해를 본 상대는 그 피해를 과연 어디서 보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또, 요즘은 MBTI라고 하여 서로 성격 유형에 관심이 매우 높지만, 이 또한 문제가 매우 많다고 하겠다.

 MBTI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객관적이거나 공식적인 자료로는 사용하기 어려운 지표일 것이며, 다소 위험한 지표임을 꼭 명심해야 한다.

 물론 개인적인 호기심이나 가볍게 서로 성격을 맞추어볼 때는 사용할 수 있겠지만, MBTI에 자기 마음을 너무 뺏기거나, 맹신해서는 아주 곤란하다.

 그래서, 단지 정확성이 매우 떨어지는 참조 자료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특히, 이를 사기업이나 공기업의 면접 자료로나, 공식적인 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아주 금물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너무 ‘MBTI’에 연연하는 모습은 사실, 타국에 비해 우리나라에의 다소 도드라지는 사회적 병리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사실, 우리가 MBTI를 직업 선택, 자기 보호, 자기 개선, 생활 가이드, 친구 고르기, 갈등 관리 등의 좋은 목적으로 사용한다고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자신이 자기 MBTI를 스스로 검사하고, 구체적으로 인식을 하게 되는 순간, 자기 성격 유형을 극복하는 데 오히려 더 장해가 될 수 있음을 잘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이 ‘아주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 유형’이라고 나왔고, 이러한 성격적 유형을 자주 인식하는 순간, 자신의 그러한 성격을 탈출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지장을 초래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즉, 자신의 성격적 장단점에 대해서는 이미 오랜 경험을 통하여 스스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자신이 MBTI 검사를 하여 이를 바탕으로 자기 성격을 개선하려는 것보다, 차라리 MBTI 검사를 하지 않고, 그러한 의식을 전혀 하지 않고서, 스스로 자발적이고 진취적으로 자기 성격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자기 스스로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이므로, 더 결과가 좋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만약, MBTI 검사에서 “나는 내성적이다. 그래서 소극적이다!”라는 결과가 나오게 되면, 이는 낙인 효과를 가져와, 당신을 더욱 그러한 성격의 구렁텅이로 깊게 밀어 넣어 버릴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MBTI를 의식하는 순간,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기 마음속 평온함은 점차 흔들리게 되어, 자기 마음이 자꾸 한쪽으로 휩쓸리게 되고, 나중에는 아무리 헤어 나오려 해도, 헤어 나오기가 매우 어렵게 될 수 있다.

 특히, MBTI 검사에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은 성격유형이 나온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는 마치 점집을 방문하여 점을 보았는데, 매우 안 좋은 점괘를 듣게 되었을 때의 상실감 혹은 팔자타령과 유사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이 아닌 타인의 MBTI를 듣게 되었을 때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상대방의 MBTI를 알게 되는 순간, 타인에 대한 편견이 생길 수 있으며, 그로 인하여, 심리적으로 타인의 장점보다는 단점에 더 주목하기가 쉽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당신의 사고는 매우 편협되게 되고, 사회적으로 폭넓고 풍부한 교류와 깊은 인맥 맺기에 많은 지장을 줄 수 있으며, 이는 당신을 아주 작고 속 좁은 인간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즉, 만약 사귀던 친구가 특정 유형의 MBTI 유형이라고 말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그 친구를 볼 때, 이전과는 달리 보이게 되며, 무슨 일에 있어서도 그 유형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결국 그러한 낙인효과로 인하여 아주 이상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버리기 쉽다.

 이렇게 되면, 당신의 객관성이나, 관대함에 많은 지장을 줄 수 있어서, 친밀한 관계 유지, 긴밀한 협조관계 유지 등에는 아주 큰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특히, 요즘은 다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글로벌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편협된 마음이 당신을 더욱 죄어올 수 있어서, 건전한 인간관계에 한계를 드러내기 쉽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으로 무엇보다 ‘상대적 관계’가 매우 중요하므로, 개인의 성격 자체보다는 서로 간의 성격적 궁합이 더 중요하다고 보아야 하고, 이러한 성격적 궁합은 아주 미묘한 감정을 주고받는 방식과 관련된 매우 복잡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너무도 쉽게 상대를 평가하고, 상대에 대해 낙인을 찍듯, 논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는, 무슨 칭찬하는 평(評)을 내어놓는다고 하더라도, 그 평에 진심이 담겨 있는 경우 혹은 구체적인 사실 혹은 실체가 분명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래서 단순히 상대에 대한 칭찬을 위한 칭찬에 불과하다면, 이 또한 칭찬으로 인한 선한 영향력은 잠시 후 금방 사라져 버릴 것이고, 상대를 특정한 틀 안에 가두어버리는, 그래서 서로 깊이 있는 관계를 발전시키지 못하도록 제한해 버리는 아둔함이 그 자리를 대신 메꾸어버릴 것이니, 이마저도 매우 주의를 하는 것이 좋겠다.

 즉, 그러한 입에 발린 칭찬의 평은 상대도 금방 알아차리게 될 것이고, 그래서 칭찬으로 인한 선한 영향은 거의 전해주지 못할 것이고, 오히려 상대를 특정한 틀 안게 가두어버리는 우를 범하게 되어, 상호 간 건전한 관계의 발전을 막아버리는 격이 되어버릴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럼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이렇게 너무 남을 쉽사리 평가하려 하는 문제와 관련된 예를 몇 개 들어보자.     

 첫째, 직장에서 부서를 바꾸게 된 A라는 사람이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자.     


 어떤 한 회사원, A가 한 부서 내에서 마찰이 좀 생겨, 타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옮겨간 부서의 부서장이 A에 대해 여러 가지를 좀 알아보기 위해, 이전에 같이 근무한 옛 부서장과 그 부서의 일부 동료들에게 그동안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과 함께 그 사람의 성격, 특성, 지극히 개인적인 정보 등에 대해 모조리 캐물어 보았다고 한번 해 보자. 

    

 그런데, 우연히도 그렇게 물어본 이들이 모두 A에 대한 성격적 궁합이 잘 맞지 않고 서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아주 좋지 못한 평을 마구 늘어놓게 되었다고 해 보자.

 이렇게 되면, 옮겨간 부서의 부서장이 A에게 아주 큰 선입견을 가질 수 있고, 그래서 A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곱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이미 새 부서장의 눈에는 오해와 편견의 장막이 완전히 씌워져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

 심지어는, 너무 밉게 보인 나머지, A의 인사 고과도 엉망으로 주고, 보너스나 성과급 등의 여러 공식적 혜택에서도 A를 뒷전으로 밀어버릴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한참 흐른 후, 그 부서장은 드디어 A가 정말 진국임을 알아보게 되고, 그의 진심도 잘 알게 되었다.

 A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어떤 생색이나 표시를 잘 드러내지 않은 터라, 주변 동료들이나 부서장이 그의 진심과 능력을 제대로 알게 되기까지는 상당히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이다. 

 부서장은 이렇게 A의 능력도, 진정성도 드디어 잘 알게 되었지만, 그래서 그동안의 자기 잘못에 대해 크게 후회를 해 보지만, 이미 때는 한참 늦은 것이겠다.


 둘째, 어느 분야의 전문가 B라는 인물이 있다.     


 전문가 B는 자기와 맞수인 전문가 C의 논문을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마구 비판을 하며, 그동안 전문가 C가 연구해 온 연구 행적과 윤리적 문제까지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마구 비판을 했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   

   

 서로 간의 관계는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갈 것이다.

 서로가 척을 지고, 아무리 맞는 말을 하여도 시큰둥해하거나, 오히려 역공을 하려 할 것이다.

 즉, 상대가 아무리 좋은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도, 못 믿겠다며, 비판거리 혹은 옥에 티만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야말로, 전문가 C를 못 잡아먹어 아주 안달이다.     


 그런데, 나중에 학계에서 더 진전된 연구 결과가 속속들이 발표되면서, 그동안의 연구와는 사뭇 다르고, 오히려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번 해보자.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드디어 전문가 C의 연구가 맞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동안 전문가 B는 스스로 쏟아낸 그 많은 비판이나 비평, 공격을 과연 어떻게 주워 담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 주변의 소소한 여러 경험으로도 보게 되면, 우리가 매일매일 많이 즐기고 있는 커피, 우유, 계란 등만 하여도, 한때는 건강에 위해하다는 논문이 무척 많았다가, 요즘은 또 항암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많이 나왔고, 또한 고지혈증 등에 문제가 많다는 논문도 동시에 제법 나와 있고, 또 환자별 질병 특성에 따라 모두 달리 적용하여야 한다는 등, 재각각 서로 다른 연구결과들이 많이 발표되어 있는 편이다.

 그러니, 아직도 그 정확한 정답이 매우 부족하고, 추가적인 연구가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할 실정이라고 하겠다.      

 특히, 학문적 연구 논문이라는 것이, 개별적으로 보면, 지극히 국부적인 지식을 다루는 경우가 많고, 아주 일부의 세부적인 고찰에 대한 내용이 많아서, 어느 한두 개의 논문을 너무 맹신하게 되면, 아주 큰코다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전문가 집단에서도, 특히 단적인 용어를 많이 써 가며 상대를 단도직입적으로 몰아붙이는 행태가 있다면, 이는 절대 곤란하겠다.       

            

“정치적 진영논리는 안 된다!”(그림;.businessinsider.com)


 셋째, 어느 당의 정치인 D라는 인물이 있다.     


 정치인 D는 제법 정치적 힘과 영향력이 큰 인물인 터라, 근거도 다소 부족한 사건을 가지고, 정치적 진영 논리에 입각하여 상대 당의 정치인 E를 몰아붙였고, 끝까지 그 사건을 물고 늘어져, 드디어 E를 감옥에 보낼 수 있게 되다고 한번 가정해 보자.

 그리고, 시간은 다소 흘렀지만, 아직 상고심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정권이 정치인 E가 소속된 정당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후 추가 조사를 계속해 보았더니, 결국 기존 수사에 많은 허점과 문제점이 발견되었고, 결국 최종 대법원 판결에서는 무죄 선고가 나왔다고 한번 해보자.  

   

 정치인 D는 과연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시 어설픈 판단으로, 엉터리 진영논리로서 정치인 E를 그렇게 괴롭혔고, 물고 늘어진 책임을 과연 어떻게 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제 정치 지형이 반대로 바뀌었으니, 정치인 D가 감옥에 가야 할 판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상대를 너무 쉽게 의심하고, 평가하고, 속단하는 결과는 의외로 아주 치명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중에라도 그 잘잘못이 뚜렷하게 판가름 나는 경우라면, 그나마 나중에라도 상황이 명쾌하게 정리될 수 있겠지만, 때로는 그  뚜렷한 증거 같은 것이 없어서, 상당히 많은 피해를 상대 맞수에게 주었는데도, 그냥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지나가버리려는 양심 불량자들도 무척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타인에게 그만큼 실질적인 손해든, 정신적인 손해든, 일단 큰 피해를 주게 되었다면, 그 이상의 대가를 자기도 반드시 받아야 함을 우리가 여러 정치 사례를 통해 많이 보아왔지 않았던가?   

     

 넷째, 방랑시인 김삿갓, 즉 ‘김병연’의 이야기이다.     


 1812년 초, 그의 조부 김익순이 평안도의 선천에서 부사를 지낼 적에, 부임 초기에 그만 ‘홍경래의 난’이 발발하고 말았다.

 이에, 김익순은 홍경래가 이끄는 반란군에게 전격 투항을 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참수에 처해졌는데, 당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라는 정상이 참작되어, 어린 ‘병연’을 포함한 그의 가족은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후 아버지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서 떠돌아다니던 피난길에 사망하였고, 어머니가 홀로 4형제를 키웠는데, 그중 차남인 병연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매우 뛰어나 주위로부터 신동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머니는, 역적으로 몰린 가문이라는 사실을 지식들이 알게 되면 그들의 성장에 크게 좋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러한 사실을 철저히 숨기게 되었다.

 그 뒤, 병연은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 20세 정도의 나이로 과거를 보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과거에 응시했을 때, 당시의 시제가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자기 가문의 비밀을 모른 채, 김익순을 아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답안지를 적어내게 되었고, 드디어 급제를 하게 된 것이다.   

  

 이후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드디어 알게 되었고, 이에 충격을 받아 한동안 멘붕의 상태로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다가, 드디어 전국을 유랑하며 세태 풍자 시를 쓰게 되었는데, 지난날 자기 조부를 신랄하게 비판한 죄책감에 계속 시달렸고, 자신이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항상 삿갓을 쓰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이름도 '병연'이라는 본명 대신 '삿갓'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스토리의 사실 관계에 대해 반론도 많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가 잘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자신이 멋도 모르고, 그것도 과거 급제나 출세에 눈이 멀어, 그 누구를 마구 욕하고, 비판하게 되면, 나중에 그 욕이나 비판이 고스란히 자기의 짐이나 멍에가 되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남을 평하거나 비판을 해도 될 경우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타인에 대한 악의가 전혀 없는 수준에서 가볍게 서로 간의 성격이나 장단점을 토론해 본다든지, 상대를 위한 진심 어린 충고를 위해 그러한 평을 한다든지, 문제성 인물에 대한 경계 혹은 조심 차원의 진심의 말을 주변에 건넨다든지 하는 등의 경우는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그 어떠한 평가도, 위의 여러 사례처럼, 극히 제한된 범위를 넘어서서는 곤란하겠다.

 자칫, 우리가 자주 비유하는 말처럼, 당신이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아 개구리는 죽을 수도 있듯이, 당신의 알량한 입으로 타인에 대해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러서는 가히 안 될 것이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위에 몇 가지 사례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한번 살펴보았지만, 우리는 정말이지, 타인을 너무 쉽게 평하지 말아야 한다.

 요즘은 인터넷, SNS 등이 고도로 발달해가고 있는 상황이라, 실시간 상대를 평하고, 욕하고, 나무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너무 조급하게 상대를 평가하고, 이러한 경박한 생각을 주위로 마구 퍼 나르는 행태는 참으로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꼴이 되기 쉽다.

 세상 이치가, 조금만 더 장기적으로 보게 되면, 자기가 상대에게 피해를 준 만큼, 자신도 다시 피해를 받게 됨을 반드시 잘 상기해 보아야 한다.

 세상에, 자기는 남들에게 계속 피해를 주는데, 자기가 계속 멀쩡할 수 있는 그러한 경우는 결코 없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물론, 일상의 재미난 이야기를 하면서 남들의 성격이라든지 가십거리를 악의 없는 정도의 선에서는,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러한 일상의 소소한 얘기의 범위를 벗어나, 실질적으로 상대에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피해를 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결코 안 되겠다.     


 우리가 꼭 타인을 아주 급하게 평해야 한다면, 잠시 자중하고, 타인을 평하기 이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라.

 자신을 먼저 한번 평가해 보아라.

 남 탓을 하기 이전에도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 항상 스스로 자기 부끄러움을 먼저 알아야 하겠다.

 그 누구도 자기 부끄러움을 먼저 제대로 깨쳐, 타인의 잘못에는 최대한 관대하여야 마땅하다.

 그래서, 절대 남을 함부로, 쉽게 비판하는 일이 없게 하여라.

 특히, 남에 대한 나쁜 평가를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이럴 경우에도 단적인 말로, 단도직입적으로, 전제도 없는 방식으로 마구 비판을 하여서는 절대 곤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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