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총무의 기묘한 이야기
새집
이사가 한창이었다. 백철은 이삿짐센터 직원들과 함께 짐을 옮기고 있었다. 승아는 만삭의 배를 부여잡고 옆에서 물건을 정리 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옮겨온 새집은 곱절로 비싼 보증금과 월세가 무색하게도 이전 집의 3분의 2 크기였다. 승아는 짐을 풀며 끊임없이 투덜댔다.
"그러게 그냥 지내자니까. 나 살찐 건 임신해서였고 자기는 이제 악몽도 안 꾸잖아."
아내의 불평에 백철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없이 미소로 답했다. 그녀의 말대로 백철은 지난 몇 달간 한 번도 악몽을 꾸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의미가 있으랴. 베란다 한 구석에 그것이 자리 잡고 있는 집에선 깨어있는 순간들이 더 지옥 같았는데.
옷장 안에 수납용 간이 박스를 채워 넣던 승아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응? 뭐지? 이상하네."
"왜?"
"박스 하나 들어갈 자리가 모자라. 사이즈 재서 개수 딱 맞게 챙겼는데."
"착각했겠지, 뭐."
"아니야! 분명 다섯 개였는데. 왜 하나가 더 많지?"
승아는 발끈하더니 남은 박스 하나를 들고 고민했다.
"놓을 데가 없는데 어쩐다?"
백철은 거실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을 가리켰다.
"당장 쓸 물건들 아니니까 일단 저기 책장 위에 올려두자."
아내에게 다가가 박스를 받아 든 순간 백철의 얼굴 위로 미심쩍은 표정이 스쳤다. 그냥 박스일 뿐인데 그의 손으로 수상한 이질감이 전달됐다. 하지만 무시하고 가볍게 들어 책장 위에 올려놨다. 그 이질감의 정체를 백철은 그때라도 눈치챘어야 했다.
태몽
어디선가 아내의 자장가 소리가 들려온다. 백철은 방문을 열고 주춤주춤 걸어 나온다. 보고 싶지 않지만 그의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거실로 들어선 백철의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익숙하면서도 뭔가 다른 느낌이다. 만삭이 된 승아가 품에 안고 있는 것은 진짜 사람의 아기다. 아기가 옹알이를 하며 아빠를 부른다. 백철과 눈이 마주친 아기가 책장 위에 놓인 박스를 가리킨다.
"승아야… 그건 누구야?"
"누구냐니? 우리 딸이잖아, 여보."
"무슨 소리야. 당신 뱃속에 있는 게 우리 딸이지."
백철의 말에 승아가 자장가를 뚝 멈춘다. 한동안 미동이 없던 그녀가 아주 천천히 백철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뭐라는 거야… 내 뱃속에 뭐가 있을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해?"
백철을 마주 보는 얼굴은 그가 알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아니다. 거칠고 차가운 단면에 겹겹이 나이테로 무늬 진, 그러나 역시 살아있음은 분명하게 느껴지는 커다랗고 옅은 갈색의 목각인형이다.
"으아아악!"
"어머! 깜짝아. 자기야, 또 꿈꿨어?"
현실의 인형에서 벗어난 그날부터 백철의 악몽은 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맨 처음 시작된 그때처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반복됐다. 백철은 승아의 손을 뿌리쳤다.
"아니야. 얼른 자."
부부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시간이 흘렀지만 백철은 눈조차 감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잠든 아내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이 끔찍한 꿈과 관련해 달라진 점이 있다면 습관이 하나 생겼다는 것이었다. 옆에 누워있는 아내가 인형은 아닌지 자기도 모르게 살펴보는 습관이었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내를 관찰하던 백철은 스스로가 한심했는지 한숨지으며 혼잣말했다.
"말이 되냐… 내가 미쳤지."
대체 이 지긋지긋한 악몽에선 언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 새벽녘에 간신히 잠들면, 그가 떠나 온 신혼집 베란다가 나타났다. 하지만 인형이 앉아 있던 낡은 의자는 이상하게도 텅 비어있는 것이었다.
백철은 다시 시작된 불면에 한층 더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그는 잠자는 시간엔 잠들어 있지 못했고 깬 시간엔 깨어있지 못했다. 멍하니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내용은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과 거실을 드나들며 뭔가를 찾던 승아가 물었다.
"여보, 영양제 모아놓은 거 어딨는지 알아? 어머님이 보내주신 건데."
"응? 글쎄."
"혹시 저 박스에 들었나?"
승아가 말하며 책장 위에 놓인 박스로 손을 뻗었다. 순간 꿈속의 장면이 백철의 뇌리를 스쳤다. 아내의 품에 안겨 그 박스를 가리키던 아기의 모습이.
"아니, 여보! 잠깐만."
백철은 다급하게 만류했다. 하지만 승아는 이미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살피고 있었다.
"어머! 백철 씨, 이것 봐."
아내가 박스 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이게 딸려 왔네? 당신이 챙겼어?"
"아니, 그게 어떻게…."
아니나 다를까, 승아의 손에 들린 건 이사 올 때 버리고 왔던 베란다의 목각인형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들어맞는 것일까. 침샘이 기능을 잃었는지 혀가 목구멍에 달라붙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승아가 인형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말했다.
"근데 여보. 이게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전보다 좀 더…"
아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백철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승아의 손에 들린 인형은 전보다 훨씬 더 사람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으니까. 마치 진짜 인간 아기의 모습 같은, 게다가…
"닮았어."
백철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승아가 맞장구쳤다.
"그렇지? 이제 보니까 당신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이목구비가 쏙 닮았어!"
인형의 얼굴은 정말로 백철을 닮아있었다. 마치 아내 뱃속의 아이가 태어난다면 딱 저런 생김새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거 이리 내!"
백철은 발작하듯 달려들어 아내의 손에서 인형을 낚아챘다.
"어머! 왜 그래?"
놀란 승아를 뒤로 하고 백철은 서랍을 뒤져 라이터를 집어든 뒤 베란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급한 마음에 난간을 뛰어넘어 뒷마당으로 달려갔다. 뒷마당 한중간에 폐드럼통이 놓여 있었다.
"백철 씨?"
"기다려봐! 이 빌어먹을 거 태워버려야 돼!"
백철은 인형에 불을 붙인 뒤 드럼통 안에 처박았다. 인형이 까맣게 그을리며 순식간에 타들어갔다. 그 순간 집에서 고통에 찬 아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악! 여보!"
"어? 승아야!"
귀를 찢는 그녀의 외침에 백철은 깜짝 놀라 황급히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