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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운 Oct 04. 2024

3, 나의 유년 시절

어릴 때부터 맞고 자란 아이는 자존감 없이 성장한다.

어디를 가도, 누군가를 만나도 눈치를 보게 된다.

인격도 올바르게 형성되지 못하고 비뚤어진 상태로 자리 잡아 매사에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이 된다. 그러다 보니 자존감이 낮아 힘든 상황이 처해지면 금세 헤어 나올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머물러 있다. 그렇게 해서 성장한 사람은 성인이 되어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자리매김하고 만다.

내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아버지를 일찍부터 잃은 난 형님들로부터 교육과 훈계를 받으며 살았다. 쌍욕이 난무했고, 말보다는 주먹어디선가 날아와 얼굴을 강타할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형님들과 같이 있으면 숨이 멎을 듯  한 순간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유년시절을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난 어른이 된 지금도 그때의 악몽이 가끔씩 떠오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아마도 트라우마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어른이 된 난 결혼을 해 자식을 둘 낳아 길렀지만 지나고 보니 나 역시 사랑으로 훈육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르고 반듯하게 성장한 자녀들에게 늘 감사함을 갖는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지금까지 살면서 비뚤어지고 망가진 자아가 완전해지기까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좋은 책과 글쓰기 때문이라고 자부한다..

책을 통해 나보다 더 어렵고 힘든 환경과 상황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를 읽으면서 어느새 나도 같이 성장하고 올바른 인격체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이다. 책이 그만큼 큰 영향력 있는 역할을 했다. 나처럼 힘든 시절과 어려움에 처한 분들이 계시다면 독서를 많이 하기 바란다.

책 속에 답이 있다.

그리고 읽은 책을 자기의 생각과 감정으로 글을 써 보시길 추천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종교를 논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심한 우울증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도도 많이 했다. 이것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그러한 만큼 방황도 깊어 갔다.

근데 희한하게 회복은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 주었다.

어떤 분이 글을 쓰면 우울증이 치유된다고 글을 써 보라고 권유했다. 태어나 글을 써 본 적이 없는 난 어설픈 수준으로 지난 과거를 하나씩 소환해 공개했다.

글을 쓰는 동안 아픔이 되살아나면서 힘든 시간들도 있었다. 근데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라 할까, 아님 은혜라 할까 서서히 과거의 아픔들이 사라지고 우울증도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얼마 전 맑은 영혼을 가진 후배가 처자식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사회적으로 직업도 괜찮은 친구였다.

후배의 아내로부터 들은 얘기는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난 전혀 몰랐다. 조금이라도 귀띔이라도 해주었다면 같이 해결 방법을 모색할 수 있었을 건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난 글쓰기를 통해 우울증을 이기고 극복했다고 말해주었을 데. 내색 한마디 않고 천국으로 간 후배가 야속하기만 하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저처럼 우울증과 과거의 트라우마와 싸우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꼭 추천해 드리고 싶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망설이지 말고 지금 시작하십시오.

 나의 유년 시절은 참 힘들고 고달픈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55세가 된 현재까지도 내면의 무엇이 괴롭게 할 때가 가끔씩 있다. 어릴 때 받은 상처와 파괴된 자아가 치유되지 않은 채로 지금까지 방치해 두고 살아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 지난 일이겠지?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아물고 없어지겠지? 생각했지만 내 경험과 사유에 의하면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이다.

어린 시절 둘째 형님이 술을 드시고 집에 오는 날이면 온 가족은 비상이었다. 공포와 무서움으로 도망가기 바빴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때리고, 부수고,  어린 나의 눈에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을 매일 이런 나날들을 보냈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소름이 돋는다.

여름에는 집 뒤에 있는 묘지 옆에서나 선창가에서 밤을 지새우고 들어가는 게 우리 가족의 일상이었고, 추운 겨울에는 옆집 아니면, 주변 친척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야 집에 들어가곤 했다.

밤하늘의 별과 달, 그리고 라디오가 나와 함께해 준 유일한 안식처이자 친구였다. 별과 달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나의 환경에 대해서 하소연도 하면서 많이 울기도 했었다. 어린 나이에 죽을 생각도 해봤다.

그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형님이 미웠고 싫었다.

어디 가서 죽고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눈앞에 보이는 자체가 증오의 대상이었다. 연민이라고 조금이라도 느낄 수 없는 존재였다.

끔찍한 생각이 옳고 그름을 떠나 너무 싫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를 못 한다. 이유는 술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지금까지도 술을 배우지도 않았고 하지도 않는다. 사회생활 하면서 술을 못한다는 이유로 선배들에게 많은 서러움도 받았지만 나에겐 술이 원수였기 때문에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다.

정말 많이 힘들고 아팠다. 지금 형님은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한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다. 특별히 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끊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렇게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진작에 끊었으면 좋았을 걸, 어머니가 고생한 걸 생각하면 가슴이 시리고 아프다.

이제는 그때의 형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아버지 없이 본인도 삶이 얼마나 힘들고 버거웠으며 술이라는 힘을 빌어 살려고 노력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결혼을 했지만, 형수님도 조카를 남겨 두도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 그러니 더더욱 암담한 현실이 낙담되어 그러지 않았을까? 감정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불안해 자기 의지하고 상관없는 삶이 형님도 분명 싫었을 것이다.

난 그때의 술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 있다.

경상도 말 중에 '그 머시라고'란 말이 있는데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머시라고' 이제는 훌훌 털어 버리고 싶다.

상처로 남아있던 내면의 자아가 치유되면 좋겠다.

둘째와 다섯째 형님이 섬에다 집을 짓고 삶의 터전을 잡아 살고 계신다.

나이가 들수록 형제들과 더 가까이 지내고 싶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짧다.

지난날 힘들게 살아온 과거는 잊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남은 삶의 여정들을 따뜻하게 나누고 싶다.

우리 생의 끝이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내가 바라는 마지막 간절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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