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TVP(가디언비자) 받기가 이렇게 까다롭다고?
장마가 오기 하루 전 6월의 아침, 제주 집을 비웠다. 일부는 서울 집으로, 그리고 나머지는 싱가포르 집으로 보냈다. 꼬박 한 달이 걸린다고 했다. 이삿짐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동안 서울에서의 삶에 빈틈을 주지 않고 오롯이 서울의 것들로 채웠다. 아쉬움이 없어야 새로운 곳에서 온전히 새로움으로 담아낼 테니. 나는 이렇듯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하고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 랜딩만이 남았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그려냈고, 확인하고, 준비했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고된 이사과정이 끝난 다음 날 아이의 학생비자를 바로 받았다. 이제 내 차례다. 나의 비자는 정확하게는 Long Term Visit Pass(LTVP), 흔히 말하는 가디언비자이다. 이 비자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이의 학생비자, 싱가포르 시민권 혹은 영주권이 있는 스폰서, 그리고 ICA에서 요구하는 각종 서류이다. 우리는 필요한 서류와 건강검진을 한국에서 미리 준비했다. 워낙 꼼꼼하게 잘 챙겼기에 스폰서가 고맙다며 ICA에 바로 제출했다. 스폰서가 직접 사이트에 로그인하여 비자 신청을 하고 각종 서류를 첨부하는데, 진행여부와 결과는 스폰서에게 연락이 가도록 되어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리고 마음 편히 기다렸다. 꼬박 한 달 넘게 말이다.
“이런 경우가 처음인데, 비자 승인이 거절되었어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러나 답답하게도 왜 거절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ICA로부터 어떠한 코멘트도 받을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입싱한 주변 학부모들에게 연락을 했다. 그들도 결과는 Reject였다. 그들의 지인들도, 심지어 비자를 갱신한 학부모들도 같은 상황이었다. 스폰서들도 일제히 당황했다. 그러나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미 아이들의 학생비자가 나온 상태였고, 아이들이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어서 빨리 LTVP를 받아야 했다.
우리가 입싱했을 무렵, 싱가포르는 3대 총리가 이제 막 집권했을 때였다. 정권 초기가 그러하듯 질서가 재정립되고 규제가 강화되기도 한다. 하필 비자 승인과 관련하여 까다로워졌다. 같은 상황에 놓인 엄마들은 서로의 정보를 공유해 주며 이 위기를 빨리 넘기고자 했다.
“우리 스폰서 말로는 남편 사업관련한 서류를 조금 더 보완해서 제출하라고 하네요.”
“우리 스폰서는 잔액증명서도 제출하자고 했어요.”
“저는 가지고 있는 학위 중에 최종학력 말고, 세계 랭킹 100위 안에 드는 학교의 졸업장을 제출하는 게 유리하다고 했어요.”
나는 전해 들은 이야기를 스폰서에게 전달하며 우리도 그와 같이 서류를 다시 작성하기로 했다. 참 의문스럽다. 가디언비자에게 학력이 무슨 소용이라고 졸업증명서까지 제출하라는 걸까? 사실 싱가포르는 학벌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나라이다. 특히 고학력자일수록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낮다고 하여 비자를 신청하는 모든 이에게 최종학력증명을 요구한다. 심지어 주재원의 배우자의 경우도 포함이다. 남편 직장 인사과에 아내의 학벌이 오픈되는 기가 막힌 상황이 펼쳐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 했거늘, 이 나라의 요구에 맞추는 것이 외국인 체류자의 도리 아니겠는가.
어쨌든 우리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서 마주하게 되는 불편한 상황들부터 해결해야 했다. 나의 비자를 재신청함으로써 발생되는 여러 문제가 있었는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들은 아래와 같다.
1. 로컬 전화번호 변경 요구
가장 번거로운 부분은 바로 로컬 전화번호 유지가 어렵다는 점이다. 싱가포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은 ‘Prepaid SIM cards’를 구입하여 번호를 부여받을 수 있는데, 이 번호 사용의 유효기간은 최대 28일이다. 따라서 비자가 없는 경우에는 다시 구매하여 새로운 번호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비자를 재신청하고 승인이 될 때까지 어쩌면 두 번 이상 번호를 바꿔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참으로 낙담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여러 방법이 있기는 했다. 통신사를 이동을 하거나 시민권이나 영주권이 있는 지인에게 부탁하여 명의를 변경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스폰서가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발 벗고 나서야 한다.
2. 계좌 오픈의 어려움
비자 문제로 계좌를 못 만들게 될 것이라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바로 이러한 오만과 편견으로 나는 트래블러 카드를 만들지 않고 입싱을 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활동에 있어서는 카드 결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지만, 싱가포르에 처음 이사를 하고 나서 발생되는 보수 문제, 에어컨 청소, 학급 회비 등과 같은 경우에는 현금 결제나 계좌 이체가 요구된다. 미리 환전해서 가져온 현금은 금방 동이 났다. 처음에는 지인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민폐스러워서 ‘머니그램’을 통해 현금을 찾았는데, 신원확인을 위한 절차가 꽤나 성가시다. 그리고 현금이 떨어질 때마다 밀려오는 불안함은 그때의 귀찮음을 잠재워버릴 정도로 대단하다.
3. 방문비자기간인 최대 90일 넘길 경우 재입국 거부
싱가포르 내 맘카페에 LTVP 승인 문제로 불안함을 호소하는 글이 올라올 때마다 나 역시 동요되었다. 입국 후 체류 기간이 이미 65일을 훌쩍 넘었다. 비자는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곧 가을 방학이 다가오니 다른 국가로 여행을 갔다가 재입국을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싱가포르 지인들에 따르면 이러한 경우에 차량을 통해 말레이시아로 가는 것은 재입국 시 문제가 발생될 수 있으니 되도록 다른 국가로 가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나의 지인은 비자 승인 기간 동안 조호바루에 갔다가 재입국하는 과정에서 꽤나 진땀을 뺐다고 한다. 다행히 한국행 리턴 티켓이 있었기 때문에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고, 비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승인되었다고 했다. 나 역시 한국행 리턴 티켓을 미리 구매하고 때마침 학교방학 기간을 맞이하여 근처 태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재입국을 하였고, 얼마 후 그토록 기다렸던 비자를 받게 되었다.
LTVP 비자를 받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4개월 정도였다. 만약 자녀가 학교를 옮긴다면 이 과정을 다시 해야 한다. 보호자의 비자는 학생비자에 의존하기 때문에 학생 비자가 취소되고 새롭게 발급받게 된다면, 보호자의 비자 역시 취소되므로 다시 신청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스폰서들이 새롭게 바뀐 비자 신청의 까다로움을 충분히 숙지하였기 때문에 비자 발급이 그때처럼 오래 걸리지 않는다. 아마 그 이후 새롭게 신청한 사람들 역시 한 달가량의 시간을 기다리면 비자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은 오랜 역사 속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며 진화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그 DNA는 위기의 상황에 불현듯 강한 의지로 깨어난다. 싱가포르 정착의 첫 단계였던 비자 신청 과정을 거치면서 불안과 답답함으로 에워싸여있던 나에게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 인간 의지를 아주 오랜만에 발견하였다.
이제 정말 싱가포르에 정착할 일만 남았다. 비로소 초록색으로 활기찬 싱가포르가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