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상림숲의 깊이가 눈부시다

좋은 벗을 만나러 가다

by 불비

함양 상림숲의 깊이가 눈부시다


길은 간밤에 달술에 취해 황톳길을 먹고 벚꽃을 토한다

가야 할 것과 가지 말아야

그 사이를 다져 제 몸을 내어준다

사람들이 아무리 몸을 밟아도

좌우 쏠림 없이 중심을 잡는다


햇빛은 개천 실여울에 몸 담그고

쩌렁쩌렁 얼었다 해랑해랑 녹았다

누군가를 울릴 수 있는

힘을 축적했다가

한 번에 숲살에 쏟아낸다


바람은 햇살이 탁탁 튀는 숲길을 문지르다

가지와 가지 사이

몸뼈를 쭉 훑어 수액을 빨아먹고

숲 위를 가르는 윗길에 드러누워 세상을 누린다




좋은 벗을 만나러 가다


시인은 세 명의 벗을 만나러 함양 상림숲에 간다. 길과 햇빛, 바람이 시인이 만나는 벗이다. 벗이란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이다. 벗이라고 성격이나 세계관, 취향 등이 같을 필요는 없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도 있듯이 비슷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끼리 무리를 이룬다. 어떤 면에서는 마치 가족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은 모임을 결성해 주기적으로 만나 서로의 우정을 다진다. 이들에게는 공통분모 같은 공통점이 하나 정도는 있다고들 생각한다. 공통점도 층위를 놓고 보면 미세하게 차이가 난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 세 명이 만나 계 모임 형식을 빌려 주기적으로 갖는다. 이 세 명에게는 술이 공통점이다. 술이라는 개념은 크게 세 가지 층위에서 다시 나뉜다. 상위 층위에는 ‘술’이라는 개념이 있다. 상위 층위에서 말하는 술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어떤 술인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술 하면 생각나는 것으로는 ‘소주’, ‘맥주’, ‘막걸리’, ‘양주’, ‘와인’ 등이 있다. 이런 종류의 술은 매우 기본적인 술의 종류로서 기본 층위에 있다. 그리고 ‘소주’라는 기본 층위에 있는 술은 하위 층위로 내려가면 지역에 따라 ‘대선’, ‘좋은데이’, ‘참이슬’, ‘진로’, ‘화이트’, ‘한라산’ 등으로 더욱 세분된다. 계 모임의 회원 세 명 모두의 경우에, 상위 층위에서는 술이 공통점이지만 기본 층위와 하위 층위로 내려가면 그 공통점은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세 명의 회원은 어떻게 계 모임을 그렇게 오래갈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이들이 서로를 형, 동생이라고 부르면서 가족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가족을 구성하는 식구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한 범주의 여러 구성원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논의한다. 그는 구성원들 간에는 공통되는 특징은 없고 서로 가족닮음(family resemblance)이 있다고 주장한다. 식구들 사이에는 체격, 용모, 눈 색깔, 걸음걸이, 성격 등 다양한 닮은 특성을 보인다. 이런 특성 중 두세 자질을 공유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실제로 이 자질 모두 다 가지고 있는 가족 구성원이 나타나는 일은 드물다.


시인이 만나러 가는 길과 햇빛, 바람이라는 세 명의 벗도 하나의 공통점이 아닌 서로 가족처럼 닮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시인은 첫 번째 벗인 ‘길’이 좌우 쏠림이 없이 중심을 잘 잡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 길에는 벚꽃이 깔려 있다. 그 벚꽃은 길이 간밤에 황토를 안주 삼아 달이라는 술에 취하여 토해낸 것이다. 이 길은 가야 할 곳과 가지 않아야 할 곳을 너무 잘 안다. 자신이 몸을 던져 경계가 되어 주어 사람들에게 가야 할 곳으로 안내해 준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가도 길은 좌우 쏠림 없이 중심을 잡는다. 이 길은 마치 공자 같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479년)는 공자는 인간의 타고난 성향을 제멋대로 두면 안 된다고 본다. 또한 삶의 성취감과 사회적 조화를 이루는 유일한 방법이 과거에서 물려받은 문화적 이상에 맞게 우리의 본성을 개조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공자에게는 문화적 이상이라는 탄탄한 길이 있고, 그 길로 우리 인간을 인도해주려 한다. 이런 공자가 시인이 묘사한 ‘길’에서 읽히는 것은 나만 그런 것일까!


두 번째 벗인 ‘햇빛’은 개천에서 비친다. 그 개천의 물은 얼기와 녹기를 반복한다. 햇빛은 밤에 힘을 비축했다가 한낮에 그 힘을 숲속으로 쏟아낸다. 이 햇빛은 맹자(孟子; 기원전 372년~기원전 289)를 닮은 것 같다. 맹자는 공자의 가치관에 일생을 바쳤지만, 무위가 외부로부터 강요되기보다는 우리의 내적 경향에서 발생해야 한다는 노자의 생각에 끌렸다. 맹자는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로움이라는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싹을 인간이 모두 갖고 있다고 본다. 우리 인간은 이런 타고난 네 가지 성향인 싹을 잘 육성하고 양성하여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맹자의 입장이다. 햇빛이 밤에 축적했던 힘은 바로 맹자가 말하는 네 가지 덕목, 네 가지 싹이다. 그리고 힘을 한 번에 숲으로 쏟아낸다는 것은 이 네 가지 싹을 잘 키워 우리 모두 조화를 이루고 살 수 있게 하는 실천의 모습이다.


세 번째 벗인 바람은 숲 위를 가르는 길에 드러누워 세상을 누리는 사람이다. 바람은 숲길을 지나면서 가지와 가지 사이를 지나가며 나무의 수액을 빨아먹고 산다. 이런 바람은 마치 노자(老子; 기원전 6세기~4세기로 추정)를 닮았다. 노자는 자연에 순응하며, 소박하고 가식적이지 않으며, 지나친 야망과 물질주의를 피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무위의 삶을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적한 시골에서 긴장을 풀고 장기를 두며 술을 마시는 현명한 늙은 도가의 모습이 ‘바람’에서 읽힌다.


공자와 맹자, 노자는 동양철학이라는 한 범주의 세 구성원이다.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은 없지만, 가족닮음의 모습은 보인다. 그 중심에는 맹자가 있다. 맹자를 공자를 추종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맹자는 노자가 찬양하는 ‘자연스러움’에 깊은 감명을 받아 공자의 유교를 근본적으로 수정했다.


벗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은 없다고 했다. 공통점은 없지만, 각 벗에게는 자기만의 고유한 특징이 있을 것이다. 그 벗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대 벗의 고유한 특징인 장점을 받아들이면 그것만큼 좋은 관계 유지 방식이 어디 있겠는가! 시인은 자기의 삶에 무언의 형식으로 도움을 줄 벗을 찾아 나섰다. 시인이 벗을 찾아간 함양 상림숲에는 좋은 벗 세 명이 다 모여 있다. 길과 햇빛, 바람은 시인을 반갑게 맞이한다. 이 벗들은 서로의 공통점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 서로의 장점이 상대방에게 ‘깊이’ 흡수될 테니 말이다! 그런 깊이는 깊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광채처럼 눈부신 깊이이다. 눈부신 깊이로 이 벗들은 서로의 도(道)에 도달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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