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우리 학교의 교무처장과 나를 중심으로 한 다섯 명의 교수들 간에 한 가지 안건을 두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 끝에 결국은 교무처장의 의견이 반영된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사실 토론 중에 심한 욕은 하지 않았지만, 상대의 감정을 건드리는 발언들이 오고 같다. 토론 이후에 교무처장은 교무처장대로 엄청나게 화가 났고, 나는 나대로 엄청난 분노에 휩싸였다. 교무처장과 나는 한동안 서로에 대한 감정이 너무 좋지 않아서 우연히 길에서 만나더라도 서로 싫어하는 듯한 표정이 여실히 드러날 정도였다.
그러나 3개월 정도가 지난 최근에 우린 서로 술 한잔하면서 화해를 했다. 사실 싸운 것이 아니니 화해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 서로에게 내뱉은 뼈 있는 말에 대해 서로 사과를 한 것이다. 교무처장과 나는 같은 나이라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서로 존대를 하지만, 사적인 만남에서는 서로 가볍게 말을 놓기도 한다. 나는 사실 교무처장을 싫어하지 않는다. 교무처장은 자기 생각을 공개한다. 즉, 자신을 상대에게 과감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상대는 그가 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지 일정 수준 파악할 수 있다.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공개한 뒤 그 생각을 굽히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는 문제였을 뿐이다. 교무처장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나와 참 다른 생각을 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바로 든다. 그래서 대화하기가 편하다. 서로 다른 부분만 논의하고 그 부분만 해결하면 되니 말이다. 한 안건에 대한 열 가지 생각 중에서 한 가지 생각만 서로 다르고 나머지는 같은 것이 나와 교무처장의 상황이었다. 우리가 6개월 전에 감정이 상했지만, 다시 이렇게 좋은 관계가 형성된 것은 나머지 아홉 가지 생각이 같고, 그런 생각들이 우리 둘의 일순간 멀어진 관계를 다시 끈끈하게 이어준 것이다.
난 학교에 있으면서 세 부류의 교무처장을 만났다. 첫 번째 부류는 앞서 언급한 가장 최근의 교무처장이다. 두 번째 부류의 교무처장은 열 가지 생각 중에서 열 가지 모두 서로 다르다는 느낌을 주는 교무처장이다. 그는 내가 어떤 안건에 대해 한 가지 생각을 제시하면 그는 다르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또 다른 생각을 던지면 또 그는 다른 생각을 말한다. 이렇게 열 가지 생각 모두 나와 맞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나 토론을 할 수가 없다. 공통점을 찾을 수 없으니 그 대화는 서로 말꼬리 잡기로 끝날 뿐이다. 이런 경우에는 대화하고 나면 공허하고 어지러운 느낌이 든다. 서로의 말꼬리를 잡고 뺑뺑 돌았기 때문이다. 물론 보직을 맡은 그 사람이 결국은 특정 안건에 대한 자기 생각이 들어간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토론은 끝이 난다.
세 번째 부류의 교무처장도 있다. 그는 자기가 무슨 생각하는지를 상대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그런 교무처장은 내가 의견을 말하면 자기도 동의한다고 말한다. 내가 또 다른 의견을 말하면 또 동의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결국은 나와 다른 생각이 묻어 있는 해결책이 제시된다. 이런 상황에서 난 뭔가 당했다는 아주 불쾌한 느낌이 든다. 나는 나를 공개했는데, 상대는 자기를 공개하지 않은 것이다.
이 세 가지 부류의 교무처장 중에서 나와 다르고 나와 반대나 대립을 형성하는 교무처장은 누구일까? 물론 모두 내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해결책을 제시했으므로 나와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반대’는 첫 번째 부류의 교무처장이다. 진정한 반대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조건이 있다. 진정한 반대를 형성하는 두 실체에 각각 그것을 구성하는 열 가지 속성이 있다고 할 때, 한 가지 속성만 다르고 나머지 아홉 개의 속성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내’와 ‘남편’은 반대말이지만, ‘아내’와 ‘아들’은 반대말이 아니다. ‘아내’와 ‘남편’은 둘 다 포유동물이고 인간이고 성인이고 결혼했고 자녀가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아내는 여성이고 남편은 남성이라는 점에서만 차이가 난다. 반면에 ‘아내’와 ‘아들’이 모두 포유동물이고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결혼 여부, 성인, 성별 등 두 가지 이상에서 차이가 난다. 이처럼 한 가지 속성에서만 차이가 나고 나머지 속성은 동일한 ‘아내’와 ‘남편’은 반대말이지만, 둘 이상의 속성에서 차이가 나는 ‘아내’와 ‘아들’은 반대말로 간주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에게 ‘김 교수는 너그럽고 참을성이 있다는 점에서 밴댕이와 다르군!’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 말에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기분이 나빠야 할까? 우리말에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말이 있다. 아량이 없고 속 좁은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이 말은 주로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남자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 흉보는 말로 사용된다. 내가 남자다운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밴댕이와 다르다는 말로 나를 칭찬한다면, 난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고 그렇게 유쾌할 것 같지 않다. 이는 ‘다르다, 반대다’는 말에서는 열 가지 속성 중에서 한 가지는 다르지만 아홉 가지는 같다는 것이 함축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말은 나의 아홉 가지 속성은 밴댕이와 같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반대말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앞서 반대말의 한 가지 특징을 소개했다. 열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다르고 나머지는 그 속성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반대말의 두 번째 특징은 이원성(binarity)이다. 반대말은 서로 양립하지 않는다. ‘X는 길다’는 ‘X는 짧지 않다’를 함축한다. ‘길다’와 ‘짧다’는 반대말이므로 무언가가 길고 동시에 짧을 수 없다. 이처럼 반대말은 서로 양립하지 않는 두 구성원만 존재한다. 반대말의 세 번째 특징은 본유성(inherentness)이다. 이원성은 우연적 이원성과 본유적 이원성으로 나눌 수 있다. 예컨대, 한 사무실에는 손님이 오면 대접할 수 있는 차가 ‘커피’와 ‘녹차’뿐이라고 하자. 그리고 우리 집 부엌에는 요리하는 데 필요한 열자 원으로 ‘가스’와 ‘전기’만 있다. 이처럼, ‘커피’와 ‘녹차’, 그리고 ‘가스’와 ‘전기’는 특수한 상황에서 반대말이긴 하지만 그 대립성은 본유적이라기보다는 우연적이며 화용적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수직축을 따라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은 논리상 두 가지로 제한된다. 즉, ‘위’와 ‘아래’의 이원성은 본유적이다.
반대말과 대립어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 유형은 ‘이원적 대립어’이다. 이것은 하나의 부정은 다른 것의 긍정을 함축하는 반대말이다. 이원적 대립어는 담화 영역을 두 개의 상보적인 집합으로 양분하므로 중간 단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등이 전형적인 예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 삶에서 이원적 대립어가 반드시 이원적이고 중간 단계가 존재하지 않게끔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조폭 집단에서 보스가 부하들에게 배신자를 잡아 놓고서는 ‘저 새끼 반쯤 죽여놔!’라는 명령을 내린다고 하자. ‘삶과 죽음’은 중간 단계가 존재하지 않는 이원적 대립어이므로, 이 지시를 받은 부하들은 마음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부하들은 즉시 배신자를 반쯤 죽여 놓는 행동을 한다. 이 부하들에게는 ‘삶과 죽음’이 이원적 대립어가 아닌 것이다.
두 번째 유형은 ‘비(非)이원적 대립어’이다. 이는 하나의 긍정이 반드시 다른 것의 부정을 함축하는 것이 아닌 반대말이다. ‘차가움과 뜨거움’, ‘두꺼움과 얇음’, ‘좋음과 나쁨’, ‘빠름과 느림’, ‘부유함과 가난함’, ‘젊음과 늙음’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비이원적 대립어는 상대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얇은 연필’과 ‘두꺼운 종이’를 비교해 보자. 연필이 얇다고 했지만 아무리 두꺼운 종이와 비교해도 종이보다는 더 두껍다. 비이원적 대립성은 등급성의 개념이 존재하므로 둘 사이에 중간 단계가 있다. 그러나 비이원적 대립어가 경우에 따라 이원적 대립어로 사용되는 일도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에게 ‘Is he a good chess-player?(그는 체스를 잘 둡니까?)’라고 질문했는데, 내가 ‘아니요’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내 대답을 ‘He is a bad chess-player(그는 체스를 잘 두지 못한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것은 비이원적 대립어인 ‘good’과 ‘bad’가 이원적 대립어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사실 난 정치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다. 운전하면서 유튜브를 통해 현재 일어나는 정치 사안을 듣는 수준이다. 그런데 그런 정치 뉴스를 듣고 있으면 많은 아쉬움이 느껴진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가장 많이 듣는 용어가 ‘토론’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사인이 벌어지면 여당 대표가 야당 대표에게 토론을 제안하거나, 반대로 야당 대표가 여당 대표에게 토론을 제안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토론회는 열리지 않는다. 공개 토론과 비공개 토론을 두고서도 서로 의견이 엇갈리기도 한다. 또는 여당은 여당대로 입장을 발표하고, 야당은 야당대로 입장을 발표한다. 같은 시간대도 아니고 같은 공간에서도 아닌 서로 간의 입장 발표이다. 당연히 시간과 장소가 다르니, 그 내용과 입장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식의 입장 발표로는 해결책이 나올 수가 없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한 시민으로서 나는 여당과 야당이 ‘진정한 대립 구조’를 이루기를 바란다. 우리나라의 ‘여당’과 ‘야당’이 한 가지 사안에 대해 한 가지는 다르지만 나머지 90%는 같은 ‘진정한 반대말’이 되는 순간을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