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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비 Aug 05. 2023

‘노인’을 위한 시적 언어

최근 정치권에서 있었던 ‘노인 비하’ 발언이 화제가 되어 거의 1주일 동안 뉴스에 일제히 보도되고 있다. 그 발언을 두고 여당과 야당 간에 의견 충돌이 치열하고, 견해차도 좁혀지지 않고 있다. 그 발언은 더불어민주당 김은경 혁신위원장이 주최한 청년좌담회(2023년 7월 30일)에서 나왔다. 그 좌담회가 젊은 사람들(20·30세대 청년들)을 대상으로 했고, 어쩌면 이들의 호응을 얻고자 했던 발언일 수도 있겠다. 김은경 위원장은 “투표장에 젊은 분들이 나와야 그 의사가 표시된다”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이 든 사람의 투표권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이 부분은 아쉬움이 남는다. 한 연령층을 설득하기 위해 다른 연령층을 살짝 끌어들이는 이분법적 대화 방식은 정치가를 포함한 우리 모두 자제해야 하는 협소한 사고방식이다. 한 연령층의 동의를 얻고 이들을 설득하고자 한다면, 반대 극단에 있는 다른 연령층을 활용하는 쉬운 길이 아니라, 해당 연련층 사람들과의 폭넓고 심도 깊은 대화로 장시간을 투자하는 어려운 길을 택했어야 했다. 


사실 지금 난 정치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노인’, ‘늙은 사람’, ‘어르신’ 등 다양하게 명명되는 이 연령층의 사람들 자체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고 싶어서이다. 그렇다고 나이를 기준으로 노인을 정의하는 생물학적 이야기도 아니다. 관련 뉴스를 접하다 보니 현재 노인인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그러다 보니 또 예전에 읽은 시 한 편이 생각이 났다. 그 시를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고, 나 또한 이 시를 다시 읽을 기회를 얻고 싶어서 글을 쓰고 있다. 시인이 노인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보면서, 늙은 사람에 대한 시적 언어를 공유하고자 한다. 그 시는 기형도(1960~1989)의 유교집인 《입 속의 검은 잎》(1989)에 실린 〈늙은 사람〉이다. 다음은 이 시의 전문이다.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그는 쉽게 들켜버린다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공원 등나무 그늘 속에 웅크린     


그는 앉아 있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허용하는 자세로

나의 얼굴, 벌어진 어깨, 딴딴한 근육을 조용히 핥는

그의 탐욕스런 눈빛     


나는 혐오한다, 그의 짧은 바지와

침이 흘러내리는 입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허옇게 센 그의 정신과     


내가 아직 한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그의 세계에 침을 뱉고

그가 이미 추방되어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

단 한걸음도

그의 틈입을 용서할 수 없다     


갑자기 나는 그를 쳐다본다, 같은 순간 그는 간신히

등나무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손으로는 쉴새 없이 단장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1연의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이라는 표현에서 늙은 사람은 일종의 딱딱한 덩어리로 간주된다. 넓게 본다면 우주의 다른 만물처럼 인간도 일종의 사물이다. 인간은 크게 여자와 남자로 구성되며 젊을 수도 있고 늙을 수도 있다. 남자든 여자든, 젊었든 늙었든 간에 모든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동물과 달리 인간은 이성을 통한 상황 대처 능력의 하나로 유연성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시인 기형도는 늙은 사람을 정신이 배제된 육체의 덩어리로 묘사하며, 더 나아가 유연함이 없는 딱딱한 존재로 간주한다. 이 표현에서 늙은 사람에게는 인간의 속성 중에서 이성의 면은 없고 딱딱한 육체적인 면만이 있다는 의미가 구성된다. 시인에게 늙은 사람은 이성은 없고 딱딱한 육체만 남아 있으므로 늙은 사람은 물건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이 표현에서는 늙은 사람에 대한 비인간성이 읽힌다.


2연의 “나의 얼굴, 벌어진 어깨, 딴딴한 근육을 조용히 핥는/그의 탐욕스러운 눈빛”이라는 표현을 보자. 이 표현은 “눈빛은 혀다”라는 은유 때문에 생성되고 이해된다. 눈과 혀는 감각을 담당하는 서로 다른 신체부위이다. 그런데도 시인 기형도는 늙은 사람을 묘사할 때 이 감각 기관을 같은 것으로 분류한다. 정확히 말해서 같다기보다는 눈을 혀에 비추어 묘사한다. 늙은 사람은 젊은 사람의 얼굴과 어깨, 근육을 탐욕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문제는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에서 어떻게 혀로 그것을 핥는다는 의미가 구성되는가이다. 이 문제는 혀로 음식을 맛보는 상황과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대응시키면 해결된다. 이런 대응의 결과로 늙은 사람이 음식에 비유되는 젊은 사람을 혀로 핥는다는 의미가 나온다. 늙은 사람의 눈빛에는 탐욕이 가득하다. ‘탐욕’이라는 표현에서 늙은 사람이 그저 젊은 사람의 육체를 부러워 쳐다보는 수동성이 아니라, 그런 육체를 갖고 싶어 하는 능동성이 보인다. 1연에서는 늙은 사람이 딱딱한 사물 덩어리였다면, 2연에서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그 인간은 수동적이지 않고 남의 것을 욕심내고 탐내며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것 같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면을 갖고 있다. 


3연의 “허옇게 센 그의 정신”이라는 표현을 보자. 이 표현은 “정신은 머리카락이다”라는 은유에 근거한다. “눈빛은 혀다”라는 2연에 등장하는 은유는 구체적인 신체부위 두 개가 은유를 구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추상적 개념인 ‘정신’과 구체적 개념인 ‘머리카락’으로 구성된 3연에 등장하는 이 은유는 일반적인 은유의 특징을 충족시킨다. 원래 은유란 이해하기 힘든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기 쉬운 구체적 개념에 빗대기 때문이다. 이 은유에서 늙은 사람의 정신은 허옇게 센 머리카락에 의해 개념화되고 있다. 정신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추상적 개념이며, 머리카락은 거의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대상이다. 머리카락은 특정한 경우가 아니면 계속해서 자라고, 사람이 나이가 들면 머리가 허옇게 세기도 한다. 머리카락은 인종마다 색깔이 다를 수 있고, 사람들은 빗으로 머리카락을 손질하기도 한다. 정신은 추상적 개념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라는 두 개의 성분으로 되어 있는 통일체로 간주된다. 육체는 어린이가 성인이 되고 또 노인이 되면서 서서히 변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정신 또한 나이를 먹으면서 변하며, 동일한 단계에서도 상황에 따라 정신이 맑아지기도 하고 희미해지기도 한다. 더욱이 나라마다 정신세계가 다를 수 있다. “허옇게 센 그의 정신”의 의미는 머리카락이 나이를 먹으면서 희게 셀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정신 또한 나이를 먹으면서 희미해진다는 것이다. 


4연에는 늙은 사람의 세계가 젊은 사람의 세계에서 “이미 추방되어버린 곳”으로 간주되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은 “늙음은 추방이다”라는 은유에 근거한다. 사람이 태어나 젊은 시절을 거쳐 늙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시인 기형도에게 늙음은 강제적인 추방의 결과이다. 늙는다는 것과 추방당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성질이다. 물론 늙는 대상과 추방당하는 대상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늙게 하는 것은 자연이고, 추방하는 것은 권위 있는 사람이나 기관이다. 즉, 늙음은 자연의 순리를 따른 결과이지만, 추방은 사회의 법을 준수하지 못한 결과이다. 추방당한 사람은 그 죄가 면해지면 원래 위치로 되돌아올 수 있지만, 한 번 늙으면 다시 젊어질 수는 없다. 이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젊은 사람은 늙은 사람을 경멸한다. 그 이유는 늙음이 자연의 순리를 위배한 결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늙음은 곧 추방이며, 여기에서 추방은 자연의 순리를 위배한 결과이다. 따라서 늙은 사람은 자연의 순리를 위배한 부도덕한 죄인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시인 기형도는 인과적 구조의 불일치를 이용해서 늙음을 추방으로 묘사하고 있다.


김은경 혁신위원장은 전국적으로 화가 난 어르신들에게 사과하는 차원에서 8월 3일 대한노인회를 찾는다. 이때 대한노인회 김호일 회장은 김은경 위원장을 앉혀 놓고 그녀의 사진 속 뺨을 네 차례 때리는 퍼포먼스를 한다. 전국 노인들의 분노를 이렇게 해서라도 풀기 위함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어쨌든 김은경 위원장의 발언 후에 전국의 노인들은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 이유는 뭘까? 단순히 자신들을 늙은 사람으로 치부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기형도 시인이 사용한 “늙음은 추방이다”라는 은유가 어르신들의 마음속에 무의식적으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본인들은 늙었다. 하지만 이 늙음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늙은 모습 이전에 자신의 가족을 위해, 자신이 속한 단체와 사회, 더 넓게는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적극성과 능동성도 발휘했다. 자신의 젊음은 어떻게 보면 이 국가를 위해 조금씩 조금씩 자신도 모르게 소진하고 닳아서 해졌다. 자식들 시집·장가 다 보내고 나니 자기도 모르게 지금의 늙은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런 늙은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싫어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자식들을 잘 키운 대가로 얻은 ‘훈장’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한 정당의 고위 관계자가 자신들을 비하하면서 뭔가 잘못하여 범죄를 저지른 죄인 취급을 한 것이다. 그러면서 ‘추방’을 시켜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을 한 것이다. 지금까지 상으로 알고 있던 자신들의 모습이 추방당할 정도로 죄를 지은 것으로 인식되었으니, 그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어른들은 감정을 심하게 다쳤다. 감정 부상은 사실 잘 치유되지 않는다. 사실 난 그게 걱정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변형시키고 왜곡해 버린 주체인 그 정당에 대한 미움이 사라지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어떻게든 다친 어르신들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치유할 수 있는 시적 언어를 찾아 어르신들에게 처방해 드려야 할 것이다. 


내가 하나 생각한 처방전은 “늙은 사람은 거인이다”라는 은유이다. 우리 평범한 인간은 홀로이 뭔가 해내기란 어렵다. 우리를 도와주고 지탱해 주는 주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가 서로 끌어당긴다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은 이런 말을 했다. “만약 내가 더 멀리 봤다면, 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뉴턴에게 있어서 그러한 거인은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라고 한다.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이 뉴턴이 자신만의 우주를 건설하는 토대를 제공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 나이 든 어르신들은 지금의 탄탄한 사회를 만들어내도록 자신의 어깨를 빌려준 거인이다. 지금의 이 사회는 그냥 이룩된 것이 아니다. 어르신들의 어깨, 거인의 어깨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이것은 진리이다. 진리는 부정되지 않는다. 약효가 뛰어난 진정한 이 ‘거인’ 은유를 감정 상처를 입은 어르신들에게 처방해서 하루빨리 회복되시어 서로 반목하지 않는 조화로운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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