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시 십일분.
어릴 때 학교에서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숫자의 시간과 분을 보면, 그 때 누군가가 날 보고싶어하는 거라고.
오전 11시 11분.
오후 11시 11분같이 23시 11분이 되는 시간이 아니라, 순수하게 11시 11분인 시간.
이건 확증 편향에 속하고 나는 시계를 시간대 별로 계속 보고 있지만 그 중에 11시 11분에만 촛점을 맞추니 특별해 보이는 것이란 걸 알고있으면서 11시 11분이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각인 효과가 이런 부분에서 좋은 것 아닌가 싶다.
반대로 기분이 나빠지는 것도 있다.
가령, 17시 58분에 오는 톡이라던가.
또는, 새벽 5시에 울리는 타인의 알람이라던가.
본능적이고 반사적으로 기분이 나빠지는 것과 좋아지는 것이 있는데, 모두 따져보면 기분이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는 요소이다.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요소들은 전부 개인의 감각과 경험으로 달라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좋은 신호인 것을 당연히 나쁘거나 지루하게 생각하고,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나쁜 신호인 것을 당연히 좋거나 기쁘게 생각한다.
감정과 생각은 그 사람 고유의 것인데도, 우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이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상대방을 이상하게 본다.
이해를 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렵단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비슷한 결 안에서 생활하고 비슷한 것만 보고 들으면서 세상은 당연히 이럴 것이다, 삶과 인생이란 당연히 그럴 것이다. 하는 생각으로 타인의 삶에 발을 디디는데, 이 때, 지금까지 보았던 것과 다른 반응을 보이는 타인을 보면 정말 신기하거나 이상한 것을 본 반응을 드러낸다.
그와 반대로, 말 그대로 그와는 완전히 반대인 사람이 있다.
자라면서 자신과 비슷한 부류를 만나지 못하고, 비슷하게 반응하는 누구도 보지 못한 사람.
그는 스스로를 이상하게 평가해버리고 만다.
배척만 받던 이는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느낄 수 없다. 동시에 주위에 섞이지도 못해.
나는 너무 모자라고 부족하고 이상해.
하고 만다.
그에게 어느 누구도 다가가거나 손을 내밀지 않는다.
그는 이상하고 별난 존재.
특별하거나 대단하다고 여겨질 일이 없다.
반응이 다르기 때문.
그는 생각한다.
세상은 나를 받아주지 않고 기댈 곳이 없어.
그렇게 홀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그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맞춰가는 법을 배운다.
오로지 맞추는 것만 배운 그는,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누군가, 그건 사랑이라고 하면 사랑인 줄 알고.
그건 네 취향이야. 하면. 취향인 줄 안다.
그는 존재하지만 그로 존재하지 않고, 사랑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진 그는 스스로 잘 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만들어진 그는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보지 않는다.
만들어진 그는 사랑하는 것을 외면한다.
그는 살아가고 있지만 살아있는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우울하다.
슬프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그는.
홀로 병들어 간다.
누군가가 사랑하고 있는 것을 사랑할 수 있고, 누군가가 싫어하는 것도 싫다고 할 수 있고, 누군가가 바라보는 방향이 그러하다 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우리는 벌써, 영겁의 세월을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그래서 나는 11시 11분을 보면 기분이 좋고, 좋다고 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11시 11분이 기분 나쁘다고 하면, 아, 너는 기분 나쁘겠구나 나는 좋아. 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것을 기분 나빠하면, 아, 나랑 생각이 다르구나 한다.
어쩌면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이일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나는 더 다양한 세계를 경험한 이를 바라보겠다.
그래서 11시 11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