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쉬는가 했던 비가 다시 내린다. 파밧 파밧 내리지 않고 세차게 주욱 주욱 내린다. 마치 무슨 말을 전달하려고 하는 사람의 입처럼. 꼭 들어달라고, 내게도 반드시 전달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하는 입처럼 내린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비(雨)파 그리고 비(非)비(雨)파. 자신 있게 말하듯 나는 전자다. 우유부단한 사람도 비에 관련된 호불호는 명확한 경우가 많다. 어우 나 비 싫어! / 난 비 괜찮은데 ~? 당신은 둘 중 하나로 응답한다. 나는 비가 괜찮다 못해 사랑스럽기 그지없고 고마운 사람이다.
나는 오히려 햇빛이 쨍한 날씨를 다루기 어려워한다. 해가 창창히 날 때의 세상은 나에게 뭐랄까 너무 부담스럽다. 반드시 환하게 웃거나 긍정적인 기분만 다루어야 할 것 같다. 너무 세상이 밝게 보여서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호수 속의 오리들도 호수 옆의 풀꽃들도 다들 저 좀 봐달라고 나에게 말하고 있는 기분이다.
그에 반해 비가 오는 날은 나에게 정돈된 감정을 선사한다. 쨍쨍한 날씨가 며칠 이루어진 뒤에는 마치 하늘 높은데 있으신 분이 비에게 "세상을 좀 청소하거라"하고 일감을 주는 것만 같다. 비가 내리면서 세상이 정리되어 간다. 저만 봐달라고 하던 건물들도 어깨를 낮춘다. 호수 속의 오리들도 조용히 자신의 털을 고른다.
비를 사랑하게 된 이유가 있을 오랜 기억들을 뒤적인다. 가장 튀어 오르는 기억은 비를 한 껏 맞고 다니던 초등학교 시절이다. 'Rain'을 부른 예술가가 말했다. 비에 홀딱 젖은 순간, 바로 그때부터 자유가 시작된다고.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집에서 5분이면 도착하는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맞벌이인 부모 밑에서 자란 나는 비가 올 때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는 것에 익숙한 초등학생이었다. 멋없이 친구의 우산을 비집고 들어가거나 찬 바람 속에서 멍하니 비가 그치기만 바라는 아이가 아니었다. 비가 오면 그때부터 내 세상의 시작이 되었다. 비를 맞는 나는 가장 생동감 넘치는 표정을 장착할 수 있었다. 온몸에 쉴 새 없이 흐르던 빗 줄기가 내가 살아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후로도 나는 성인이 된 지금도 집에서 나가는 길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자주 비를 맞으며 다닌다. 이때 반드시 손에는 펼쳐지지 않은 우산을 들고 있어야 한다. 걸음걸이는 일 자로 걷지 않고 갈 지자로 유영하 듯 걸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빗속에서의 로맨스에 늘 항복한다. 진부하지만 영화 클래식에서 두 남녀가 셔츠를 우산 삼아 뛰어가는 장면은 항상 좋다. 우산이라는 공간이 어쩐지 너무 낭만적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무조건 1인용으로 만들어진 것. 우산의 크기가 커지고 기능이 향상되는 것 또한 모두 덜 젖을 '한' 명을 위해서라는 것. 하지만 마음이 있으면 기꺼이 2인용이 되는 것. 같이 밥을 먹는 것보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가까이 있으면서 어디든 함께 발을 내디뎌야 하는 것.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있으면서 절대 그 사실을 티 내어서는 안 되는 것.
나에게 벌칙은 애인과 함께 있을 때 우산을 나누어 쓰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애인이 되기 전이라도 마음이 통하는 누군가와 우산을 나누어 쓴 뒤, 건물에 들어와 그의 젖은 어깨를 본 순간, 나는 무조건적으로 그를 더 사랑스럽게 바라볼 것이다.
바라볼 때만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건 인정한다. 비비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도 시원한 데서 비 오는 거 바라보는 건 좋아해. 비 내릴 때 밖에 있으면 너무 찝찝하고, 축축하고, 그냥 우울해져.
비비파들이 싫어하는 비 오는 날 의지와 상관없이 바깥을 나가게 된다면 이렇게 한 번쯤 생각해 보자. 이 비를 뚫고도 너를, 이 일을, 이 상황을 만날 수 있어 놀랍다고. 아침에 공들여 고데기 한 앞머리가 오는 길에 축 달라붙어 있는 것이 어쩐지 만화 캐릭터 같아 우스꽝스러우면서 귀엽다고 말이다. 그 일정에 누군가가 함께 있다면 너는 나와 폭풍우를 같이 겪은 전우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는 것도 좋다. 빛을 쬐어 주거나 물을 내리거나 얼음을 떨어뜨리는 하늘의 기분과 상관없이 나는 내 기분을 온전히 지켜내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이렇게 열정적으로 비를 영업하는 이유는, 비 오는 날, 비가 온다는 이유 만으로 나와의 약속을 취소해주지 않았으면 하기 때문이다. 비가 올 때의 나는 오지 않을 때의 나보다 몇 배는 더 컨디션이 좋으니 정돈된 세상 속에서 당신을 배로 재미있게 해 줄 수 있다는 출사표와도 같은 글이다. 당신은 비파를 이해하는 사람일 수도, 비비파를 이해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도 없는 이유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좋아하고 미워하니 말이다. 하지만 비는 이런 우리의 이해도와는 상관없이 정직하게 내린다. 정직하게 자기의 길을 간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비를 조금은 더 이해해주어야 할 것이다. 비에 대한 감상을 지니고 있는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 그 자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