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의 미학

멈춤을 통해 다시 나아간다

by EveningDriver

나는 평소, 후진 기능을

그리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다 불편할 때

잠깐 쓰는 기능일 뿐이라고 여겨왔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후진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다시 나올 수 있는 기회’라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좁은 골목길이나 막다른 아파트 단지 안에서

예상치 못한 구조물이나

이중주차된 차량 사이에 갇힐 때가 있다.

그 순간 느껴지는 막막함은,

내가 선택한 동선이 틀렸다는 사실을

조용히 인정하게 만든다.


그럴 때,

후진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길이 없다고 느꼈던 곳에도

조심스럽게 돌아나올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후진을 하다 보면

앞서 지나올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 저기 저런 돌출 구조가 있었네.

이걸 피해 지나온 게 정말 다행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서야 깨닫는다.

부딪히지 않고 지나왔던 수많은 장면들이

결코 당연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걸.

운이 좋았다는 사실.


직진만 땐 그런 걸 잘 알 수 없다.

속도가 붙으면 붙을수록

내가 잘 가고 있다고만 생각한다.

그 길이 최선이었는지,

위험은 없었는지조차

돌아볼 겨를 없이 지나쳐버리기 마련이다.


지나고 보니, 삶도 다르지 않다.


가능하다면 누구나

후진 없이 살아가고 싶어 한다.

계속 앞으로만 가도 괜찮은 인생이라면

그것만큼 단순하고 평탄한 일이 또 없을 테니까.


하지만 현실은,

길이 언제나 곧게 나 있지 않다.

우리는 예고 없이 꺾인 모퉁이를 만나고,

예상하지 못한 벽에 부딪히며

비로소 돌아나와야 할 때를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에게 후진이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것.

이건 축복에 가까운 일이다.

멈추고, 다시 살피고,

조심스레 물러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막힌 길에서 빠져나와

다시 넓은 길을 만났을 때,

이 모든 과정이

그저 시간 낭비는 아니었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때 멈추지 않았다면

놓쳤을 것들이 많았을 테니까.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이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음에는 더 나은 쪽을 선택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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