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무질서 속의 균형

by EveningDriver

배달을 시작한 뒤로
내비게이션이 찍어주는 좌표를 따라
골목과 대로, 지하주차장과 언덕길까지
서울의 구석구석을 다니게 됐다.

예전에도 운전은 자주 했지만
지금처럼 낯선 길을 자주 오간 적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풍경들이
자연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신호를 무시하는 차도 많고,
정지선을 넘는 모습도 흔하다.
보행자의 무단횡단이나
갑작스러운 끼어들기 같은 일들도 어렵지 않게 마주친다.
나 역시 밤길을 달리다 보면
낯선 상황들과 종종 마주친다.
누군가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하고,
내가 브레이크를 늦게 밟을 뻔한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식은땀이 흐르지만
다행히 사고로 이어진 적은 없다.
그리고 그런 순간마다
다른 사람들도 무언가를 감지한 듯
미리 멈추거나, 비켜주곤 했다.
위태로워 보이지만
어딘가 조율되고 있는 것 같은 장면들.
자연스럽고, 그래서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실수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잠시 멈춘다.
피해주고, 기다려주고, 한 발 물러선다.
마치 어디선가 작동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완충 장치처럼.

특히 좁은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
그 조율은 더 분명하게 느껴진다.
주차된 차들, 오토바이, 전봇대,
그리고 쓰레기 수거함 사이로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틈이 생긴다.

잘못 든 길처럼 보여도
속도를 줄이고 방향을 조절하다 보면
어떻게든 통과하게 된다.
그 또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작은 배려와 주의의 결과다.

도시는 완벽한 질서로 굴러가지 않는다.
질서와 무질서 사이,
느슨한 긴장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
그리고 그 균형을 유지하는 건
신호나 단속 같은 규칙이 아니라
도로 위 사람들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각자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정말 넘지 말아야 할 선은
함께 지켜낸다는 믿음이 있다.

도시가 하루하루를 무사히 견뎌내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오늘도 어김없이 확인하게 된다.
그 덕분에, 오늘도 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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