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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말 끝에 닿은 진심

진실에 도착하는 밤

by EveningDriver

퇴근 후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던 저녁들이 있었다.
아이를 씻기고, 밥을 먹고, 책을 읽어주고,
재워놓은 뒤엔 아내와 가볍게 맥주 한 잔을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소박하지만 나름의 질서와 따뜻함이 있는 루틴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퇴근 후 배달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야 굳이 설명할 일은 아니었지만
단 한 사람, 우리 아이에게만은 이유가 필요했다.

“왜 아빠는 밤마다 나가?”

처음엔 솔직하게 말할까도 했다.
하지만 ‘배달’이라는 단어는
아직 어린 아이의 수많은 “왜?”를
끝도 없이 불러올 게 분명했다.
그래서 아내와 상의 끝에 이렇게 말하기로 했다.

“아빠, 운동하러 간다.”

그 한마디는 의외로 쉽게 받아들여졌다.
“아빠도 운동 해?”
아이도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평소 저녁마다 운동을 나가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그 말을 내뱉을 때마다 작게 걸리는 감정이 있었다.
운동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해야만 했던 나 자신이
어딘가 작아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내가 아이에게만큼은
정직해야 하는 건 아닐까,
작은 죄책감과 갈등이 자주 마음을 맴돌았다.

그런데, 그 말을 반복하던 밤들 속에서,
어느 순간 진심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밤,
수많은 계단을 오르고,
골목과 언덕을 오가며
도심 속 밤거리를 빠르게 달렸다.
숨이 차고, 땀이 흐르고,
몸이 반응했다.
단순한 산책도, 느긋한 조깅도 아닌
제법 강도 높은 유산소 운동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도 더 많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지 생계를 위한 일이었지만
밤의 도로를 달리는 시간 속에서
내 하루를 되돌아보고,
우리 가족의 내일을 떠올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잊고 지내던 질문들이
서서히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나며,
아이의 질문도 다시 떠올랐다.
“아빠, 운동하러 가?”

이제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더는 피하지 않고,
진심을 담아 대답할 수 있다.

그래, 아빠는 운동하러 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말이 이제
너에게 거짓이 아니게 되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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