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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따뜻해진다

잠시 멈춰 선 날의 기록

by EveningDriver

4월에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단 한 번도 주말을 쉰 적이 없었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도로 위를 달리는 게 당연했다.
하루가 하루를 밀어내며 흘러갔고,
피로도 익숙함도 그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렇게 반년이 흘렀고,
언제부턴가 그 리듬이 내 일상이 되어 있었다.

“이번엔 진짜 쉬어.
그동안 한 번도 못 쉬었잖아.”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조용히 건넨 짧은 말 한마디.
그제야 실감이 났다.
추석이니까, 겸사 쉬기로 했다.

처음엔 조금 어색했다.
그동안의 속도를 갑자기 멈춘 듯해서,
몸이 헛헛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금세 익숙해졌다.
언제 내가 배달을 하던 사람이었나 싶을 만큼,
그 일은 어느새 내 바깥의 일이 되어 있었다.

명절에도 미션 알림은 계속 울렸다.
지역별 보너스도 유난히 많았다.
하지만 그 알림음이 더 이상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편했다.

비 오는 토요일 오후,
가족과 스타필드를 천천히 돌았다.
비 피하기 좋고, 먹을 곳 많고, 주차가 무료다.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문득 생각했다.
‘이게 남들처럼 평범한 주말이구나.’
이 낯선 한가함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별것 아닌 순간이었는데 괜히 웃음이 났다.

트레이더스에서 맥주 한 팩을 들고 나왔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주말이 당연했다.
별다른 계획 없이 돌아다니고,
피곤하면 커피 한 잔, 심심하면 맥주 한 캔.
그 평범함이 얼마나 특별한 것이었는지를 그땐 몰랐다.
사소한 일상의 여유가 이토록 그리운 것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다.

일요일이 되었다.
언제나처럼 오전에는
가족과 함께 익숙한 자리로 향했다.
하루의 시작이 고요하게 열렸고,
그 평온이 오래도록 남았다.

점심을 먹고 아내가 내게 말했다.
“말했지? 오늘은 그냥 시간 좀 써.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저녁도 먹고 와.
아이 재우기 전엔 들어오면 혼나!”
그 말이 다정한 명령처럼 들렸다.

한때는 극장이 가장 나다운 공간이었다.
학부 시절에도,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에도,
결혼하고서도 한 달에 두세 번은 꼭 갔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코로나19가 지나고,
배달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그 공간이 점점 멀어졌다.

이번엔 달랐다.
최애 배우 이병헌이 나오는 영화가 개봉했고,
박찬욱 감독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극장을 안 간 지도 꽤 오래였는데,
SK텔레콤 T멤버십에서 CGV 무료관람권을 주더라.
예전엔 자주 다녔던 덕분인지, VIP라고 했다.
이해는 안 됐지만, 기분은 좋았다.

불빛이 꺼지고,
스크린이 어둠을 밀어낼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
잊고 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어쩔 수가 없었다.

영화가 끝나자
고기와 소주 한 잔이 생각났다.
잠깐 고민하다 시끌벅적한 삼겹살집 대신
오랜만에 양꼬치가 떠올랐다.
차분한 속도로 혼술하기 좋을 것 같았다.
가격 부담도 덜했고,
마음도 그만큼 가벼웠다.

그날 밤, 나는 한양대 앞 양꼬치집에 앉아 있었다.
숯불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고,
기름이 숯에 떨어지며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어느덧 두 병째였다.

소주를 한 잔 따르고,
입안 가득 퍼지는 알코올의 온도를 느꼈다.
기름이 녹아내리듯 부드럽게 목을 타고 내려갔다.
곧바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올렸다.
젓가락 끝에 지글거림이 살아 있었고,
타닥거리는 불소리와 함께
시간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시끄러운데 마음은 고요했다.
별것 아닌 저녁이었는데,
왠지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감정의 복귀였다.

불빛이 번지는 밤,
양꼬치 연기가 천천히 퍼지고,
잔에 남은 소주가 사라져갔다.
옆 테이블과 세상은 여전히 분주했지만,
내 마음은 따뜻하게 고요했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나 자신을 위로하는 법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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