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락과 경계 사이에서
배달을 하다 보면 고객의 문 앞에 닿기 전,
몇 번의 작은 관문을 조용히 넘어야 한다.
그중 가장 익숙한 건 공동현관이다.
아파트든 빌라든 키패드 앞에서 잠깐 멈춰 서고,
고객이 남긴 숫자들을 천천히 눌러본다.
어떤 곳은 아예 다르다.
“경비실 호출 누르고 들어오시면 됩니다.”
비밀번호조차 필요 없이,
누군가의 허락만으로 문이 열린다.
그 동네만의 조용한 방식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일부 고급 공동주택은 절차가 길어진다.
1층 데스크에서 이름과 연락처를 적고,
임시 출입증을 받아서야 엘리베이터 앞에 설 수 있다.
나인원한남은 주차장부터 이 과정을 거친다.
이곳은 소지품을 맡겨야 하는데,
한 번은 마땅한 게 없어
졸음방지껌을 내놓고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런 장소에서는 비슷한 말을 듣곤 한다.
“세대 호출은 누르지 마시고 출입증으로 들어가세요.”
“호출 버튼 절대 누르시면 안 됩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말투에는 경계와 책임이 함께 묻어 있다.
반대로, 오랫동안 이어져온 방식도 남아 있다.
“대문 옆 우편함 안에 열쇠 있습니다.”
“나가실 때 꼭 다시 잠가주세요.”
낡은 금속 냄새가 묻은 열쇠를 잡으면
익숙함보다 신기함이 먼저 온다.
한 번은 대문에 열쇠가 끈으로 묶여 있었다.
그걸 잡아당겨 자물쇠에 꽂으니 문이 열렸다.
사람을 막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길 잃은 강아지 같은 것을 막으려는 걸까.
괜히 혼자 별별 상상을 다 해보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숫자의 패턴들이다.
1234처럼 이어지는 단순한 조합,
가로 혹은 대각선으로 미끄러지는 패턴,
같은 숫자만 반복되는 경우들도 많다.
한 번은 그날 날짜와 같은 번호를 눌렀다.
예를 들어, 10월 23일, #1023#.
문이 열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혹시 오늘이 누군가의 생일일까.’
배달을 마치고 나면 모든 정보는 사라진다.
메시지도, 공동 출입번호도 화면에서 사라진다.
캡처할 수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주문 알림음이 다시 울리면
나는 또 다음을 향해 움직이기에 바쁘다.
생각해보면 조금은 신기하다.
사람들은 이처럼 쉽게
자기 삶의 입구를 타인에게 건넨다.
집 안은 아니니까 괜찮다고 여기는 걸까,
택배와 배달이 익숙해진 시대라 그런 걸까.
어쩌면 별일 없을 거라는
믿음이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그 조심스러운 믿음 사이를 오간다.
누군가의 하루 안으로 잠시 스며들었다가,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돌아서곤 한다.
문을 열고 닫는 그 순간마다
사람들이 내어주는 마음을 느낄 때가 있다.
별 의미 없이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 믿음이 너무 쉽게 꺾이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 잠시 내어준 마음들이
내일도 그대로 돌아올 수 있는 세상,
그런 하루가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