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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정적

생각이 앞서 달린 밤

by EveningDriver

공기가 서서히 차가워지던 어느 밤이었다.
치킨 한 봉지를 들고
중구 다산성곽길 인근의 골목을 올랐다.
목적지는 네 개 층으로 된 빌라의 맨 위층.
그 층은 한 세대만 사용하는 구조라
계단을 따라 올라갈수록 점점
그 집의 기운이 또렷해지는 곳이었다.

3층쯤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벽을 따라 놓인 크고 작은 화분들,
애정을 들여 꾸준히 돌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4층에 거의 다다랐을 때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대신 방충망이 집과 바깥을 가르고 있었다.

안쪽은 불이 꺼져 있었고
거실 가까운 곳에서 TV의 희미한 빛만이 보였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괜히 더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며
치킨 봉지를 방충망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계단 쪽으로 한 발 물러섰다.
그런데 몇 걸음을 내려가던 순간 발이 멈췄다.

‘왜 반응이 없지. 치킨 식을 텐데.’
‘그냥 주무시는 걸까.’
‘혼자 계신 것 같은데, 혹시...’
별것 아닌 생각이 크게 부풀 때가 있다.
그날이 그랬다.

나는 다시 천천히 4층으로 올라갔다.
헛기침을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배달 왔습니다...”

대답 없는 정적이 이어졌다.
몇 초에 불과했을 텐데
그 잠깐의 시간이 이상하리만큼 길게 느껴졌다.
‘혹시 정말? 119에 전화해야 하나?’
마음이 순간적으로 앞질러 나가려는 찰나,
안쪽에서 짧은 기침 소리가 났다.

나는 다시 한번, 조금 더 또렷하게 말했다.
“배달 왔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예.”
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괜히 혼자 마음이 먼저 달려갔구나.

계단을 내려오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매일 누군가의 문 앞에 닿지만
그 문 안에 어떤 하루가 흘렀는지는 모른다.
누군가는 잠시 휴식을 보내고 있을 테고,
누군가는 버티는 중일 테고,
누군가는 무너져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하루에도
사실은 말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조용히 쌓여 있는 건 아닐까.

다시 차로 돌아가면서,
내가 오래 머무는 일들에 대해
한 번쯤은 마음 속에서라도
작은 매뉴얼을 만들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비슷한 순간이 다시 오더라도
조금은 덜 당황하고,
조금은 더 조심스레 다가가고 싶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늘 그런 마음의 여백을
조금씩 마련해두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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