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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그 한마디

소소한 것의 힘

by EveningDriver

배달을 시작하면 식당에서 픽업하는 순간,
상세주소와 함께 고객의 요청 메시지가 도착한다.
가장 흔한 건 “문 앞에 놓아주세요. 벨X, 노크X.”
그 다음은 “문 앞에 놓고 벨 눌러주세요.” 정도다.

조금 더 구체적인 경우도 있다.
“아기가 있어요. 벨이나 노크 절대 하지 말아주세요.”
“개가 짖습니다. 조용히 부탁드려요.”
나도 아이가 신생아였을 때,
배달이 올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 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이런 배달은 작은 실수도 하지 않으려 더 조심한다.

가끔은 “직접 받을게요. 도착 전에 전화주세요.”
주소 노출을 꺼리는 건지,
배달 사고를 걱정하는 건지 알 수는 없다.
어쨌든 그런 경우는 또 다른 주의가 필요하다.

이 정도까지는 흔히 보는 요청이다.

주문자의 고심이 느껴질 때도 있다.
한남동 주택가에 배달 갔을 때였다.
“골목 끝 왼쪽 하얀 대문, 옆 골목으로 들어와
끝 집 옥탑 초록색 신발장 위에 놓아주세요.”
처음엔 이걸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는데,
설명대로 가다 보니 정말 초록 신발장이 있었다.
순간 퀘스트를 클리어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 문구를 쓰기까지 얼마나 고민했을까 싶어
괜히 고개가 끄덕여졌다.

물론 눈을 의심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혹시 가능하시면 담배 OOO 한 갑 부탁드립니다.”
“오는 길에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 네 캔 부탁드려요.
현금 드리겠습니다.”
인터넷 기사에서만 보던 황당한 요청이
실제로 내 화면에 뜬 적도 있었다.
성의라도 있게 맥주 브랜드 정도는 쓰지,
싶어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경우엔 괜히 마주치지 않으려
더 재빨리 배달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지난 주말, 금호동에서의 배달.
치킨을 싣고 언덕길 골목에 들어서자
길은 점점 좁아지고, 앞서 걷던 주민은
자꾸 뒤를 돌아 나를 쳐다봤다.
분명 자동차 모드로 설정했는데,
네비는 계속 더 들어갈 수 있다고 안내했다.
이럴 때가 가끔 있다.
왠지 불안해 차를 후진해 빼내고, 대신 걸어서 올라갔다.

코너를 돌자 오토바이 하나 겨우 지날
좁은 골목이 눈앞에 나타났다.
길은 더 가팔라지고, 숨도 조금 차올랐다.
주소를 찾으며 배달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을 때
그제야 눈에 들어온 한 줄이 있었다.

“올라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원래도 짜증이 날 상황까지는 아니었지만,
덕분에 피식 웃음이 났다.
“수고는요, 맛있게 드세요~” 하고
속으로 대답을 건넸다.

치킨을 내려놓고 돌아가는 길,
내리막이 발걸음을 가볍게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수고했다는 그 흔한 말이
발걸음보다 먼저
내 마음을 환한 길 위로 이끌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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