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에서 일하다 보면 정신없이 바쁘지만 환자의 얼굴은 두세 번 보면 대부분 기억이 난다. 번번이 아는 척하면 불편하게 느낄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해서 굳이 억지로 라뽀를 쌓으려 하지 않는 편이다. 다만 지난 조제약에 변동이 있으면 해당 부분만 알려주고, 질문하는 걸 어렵게 느끼지 않게 대답만 상세히 해주는 정도여서 나 스스로는 내가 딱 주어진 일만 하지 친절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한 외국인 환자는 항상 멀리 있는 병원의 처방전을 가지고 우리 약국으로 내방했다. 단순히 이 동네에 살아서 그런가 보다 하며 늘 같은 약을 먹길래 간단히 복용법만 영어로 설명해줬었다. '지난번 먹었던 약이라 알지?' 하면 그녀는 '응! 그런데 술 마시면 안 되지? 어떡해 나 휴가인데' 이 정도 스몰톡만 주고받는 사이였고 그녀도 늘 밝고 친절해서 역시 미국인들은 모두에게 스윗하네.. 하는 생각만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약을 받고 나서, 본인이 미국을 가야 하는데 이 약을 가져가도 괜찮냐고 물어봤다. 나는 잠시 집에 가는 건 줄 알고 출국심사 시 도움 되는 약 설명서를 챙겨주며 '안전하게 잘 다녀와!' 했는데, 그녀는 발길을 주춤하더니 머뭇거리다가,
"난 사실 이 병원 되게 멀리 있는데, 네가 영어로 잘 설명해주고 항상 친절하게 대해줘서 일부러 여기까지 왔었어. 나에게 늘 친절하게 말해줘서 고마웠어. 난 이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에 머물면서 늘 걱정이 많았는데 네 덕분에 약국에 오는 건 마음이 편했었어. 행운을 빌어."
하고 가는 것이다. 짧은 시간이라 제대로 잘 가라는 인사도 못했다. 내가 인지하지도 못했던 아주 작은 친절이 부지불식간 타인에게 이렇게 크게 가닿다니.. 그녀가 먼 병원에서 일부러 버스를 타고 올 정도로 내가 친절하게 대해줬나 복기해보면 그 정도가 아니라 미안했다. 타국 생활이 그만큼 외로웠을 그녀에게 먼저 한 두 마디 걸어주며 더 따뜻하게 대해줄걸 아쉬웠다.
비가 장대처럼 쏟아지던 날, 점심 먹고 왔더니 직원분이 어떤 아주머니께서 약사님 주라고 떡을 사놓고 가셨다고 전해줬다. 약사님이 친절하게 대해준 게 고마워서 동네 맛있는 떡집 떡 주고 싶어서 사 왔다고 하시는데, 아무리 묘사를 해줘도 누군지 모르겠더라.
다행히 며칠 뒤 그분이 방문하셔서 직원분이 알려주셨는데 그때서야 기억이 났다. 다리 한쪽이 불편하신 분이라 나는 그 장대비를 뚫고 온 분이 이 분일 거라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가끔 얼굴에 멍이 시퍼렇게 들고 늘 지쳐 보이셔서 괜히 마음이 쓰였던 분이다. 남편과 한 번 온 적이 있는데 남편분이 너무 거칠어서 혼자 좀 찝찝한 마음에 이분께 일부러 보란 듯이 친절하게 대했던 기억이 났다.
떡은 정말 맛있었고 아주머니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했지만, 나의 아무것도 아닌 한 두 마디를 이렇게 고맙게 여기는 마음이 당신의 지침으로 인한 게 아니기를 빌뿐이다.
가끔 외로움이 드리워진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면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이지만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 과연 나의 아주 작은 친절이 그분들에게 유효하게 다가갈까 싶기도 하지만 아니면 어떤가! 차가운 세상 속 작은 한 두 마디에 온기를 느끼는 사람들을 이미 몇 번이나 만났는걸. 다정함은 밑져야 본전 아닐까?
사실 나는 카페 직원의 친절한 말에 감동받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작은 친절이 파도처럼 큰 마음으로 돌아올 때면 송구스럽고 부끄럽기도 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힘이 생길 때가 있다.
비록 오늘 아침에도 분노조절 못하는 할아버지랑 싸우고 욕했지만 어쨌든 사람 간 온기는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져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