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대를 졸업하면 대개 세 갈래의 선택지가 생긴다. 크게 로컬 약국, 병원, 제약회사 세 군데가 있는데 하는 일이 비슷할 것 같지만 업무의 결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실습 후 본인 적성에 맞춰 선택한다. 로컬 약국은 나중에 얼마든지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병원이나 제약회사에서 경험을 쌓는 경우도 많다. 약대 마지막 학기에 이 세 군데 실습을 돌았는데, 나는 병원과 제약회사는 너무 답답했고 그나마 재밌었던 게 약국이었다.
병원의 장점 중 하나는 비슷한 연령대의 젊은 약사들이 많다는 것이다. 병원마다 분위기가 다르긴 하지만, 또래 신입 약사들끼리 으쌰 으쌰 하며 학교 다니는 기분으로 이론적 공부도 함께 하며 어렵고 생소한 약을 많이 다룰 수 있다. 또 다른 장점은, 로컬 약국은 업무나 체계가 정말 복불복인데 반해(제대로 된 곳 별로 없음) 체계가 잡혀있고 연차를 쓸 수 있으며 복지가 있다는 점이다. 또 항암제 배합, 약제 관리, 약제부 시스템 관리 등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야무지게 쓸 수 있는 이상적 '약사'에 가까운 모습일 수 있다. 그렇지만 급여가 많이 오르지도 않고, 야간 근무는 피할 수 없으며, 항암제 다뤄야 하는 이슈 등으로 퇴사율도 높은 편이다.
제약회사는 공장에서의 QA, QC 업무나 연구소에서 신약 개발 등의 연구, 본사에서 새로 나오는 약들을 검수하고 책임지는 일을 할 수도 있다. 마케팅이나 영업 등 할 수 있는 일은 다양하며 부서에 따라 역할이 천차만별인 편. 나는 실습을 너무 구린 시골에 있는 제약 공장에서 해서 약사가 하는 업무는 잘 숙지하지 못했다. 외국계 제약회사 인턴이나 실습을 했다면 한 번 도전해 봤을지도..
가장 많이 가는 약국은 일반약 매약, 처방전 조제&투약이 주된 업무다. 이렇게 말하면 되게 간단해 보이고.. 많은 사람들은 "하루 세 번 드세요" 하면 끝이지 않느냐? 인생 개꿀이지 않느냐? (이 말 많이 들었음) 하는데.. 지들보고 똑같이 말하면 대극노 할 거면서 ㅠ 아무튼,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실상 약국은 조용한 전쟁터다.
1. 일단 조제실 안은 온갖 약들로 그득그득한데 그 약들의 재고나 유통기한 관리를 틈나는 대로 해야 한다.
2. 조제를 할 때도 약마다 특성이 다르다. PTP포장을 까면 안 되는 약, 포장해달라고 하면 PTP를 다 까야하는 약, 변색되는 약, 갈면 안 되는 약 등.. 그런 특성을 다 숙지하고 알맞은 조제를 해야 한다.
3. 병용 금기나 타 병원에서 먹는 약이 중복되면 알려줘야 하며 특정 성분에 알레르기가 있는 환자는 병원에 전화해서 고쳐줘야 한다.
4. 병원 처방에 오류가 있으면 캐치할 수도 있어야 한다.
5. 약학 정보는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고, 환자마다 나타나는 부작용이 다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공부해야 되기도 한다.
조제를 할 때에는 한 치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늘 긴장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잠깐이라도 잡담하면 틀리는 경우가 많음) 환자가 언제 올 지 모르기 때문에 쉴 틈도 별로 없고 하루 종일 서있게 된다. 더불어 각종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이게 사실 사회로 나온 약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점이다. 대부분 모범생으로 바르게 살아온 학생들은 처음 마주하는 각종 인간군상들로 정신이 급 피폐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쓰고 나니 단점만 쓴 것 같지만.. 내가 열심히 공부한 지식이 사람들의 건강에 응용할 수 있다는 점, 가족들의 건강도 책임질 수 있다는 점, 그래도 쾌적한 업무를 할 수 있으며 지식이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는 점이라는 장점이 더 크기 때문에 나는 현재 만족한다. 언젠가는 나도 개국을 해서 내 사업체를 꾸리겠지만 현재 나는 동네 약국에서 근무 약사로 일하고 있다. 그 소소한 기록을 지금이라도 남기기 위해 브런치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