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
지금이야 벼루를 잘 쓰지 않지만 벼루는 붓글씨를 쓰려면 꼭 필요한 물건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오래전 우리 집에는 제법 큰 벼루가 있었고 아버지는 제삿날이나 명절이면 지방을 쓰기 위해서 먹을 갈았고 붓글씨로 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의 지방을 쓰시곤 했다
그리고 특별히 그런 날이 아니어도 먹을 갈아 신문지에 곧잘 한자로 붓글씨를 써시곤 했다 덕분에 어린 나이부터 붓글씨를 쓸 수 있는 환경이 되었고 언니는 붓글씨를 아주 잘 쓰는 편이었다 대학을 들어가서도 붓글씨를 쓰는 동아리에 잠시 머물러 글을 쓰기도 했다 언니는 윤동주의 시도 전서체도 아주 잘 썼다 서예대회에서 상도 받을 만큼 아주 잘 쓰는 편이었다 나는 대체로 한글로 윤동주의 시를 썼으며 한문은 잘 쓰지 못하는 편이었고 중간에 그만두었다
그런데 이 벼루에 관한 수많은 기억들 가운데 어느 절에 갔는데 그 절 마당 한구석에서 벼루를 보게 되었다 주지스님은 그 벼루가 수많은 그림을 그려낸 이력을 지녔다고 했고 나는 아무리 봐도 벼루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낸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오래된 벼루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쓰시던 벼루에서 미루어 보아 그 모양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왠지 그 스님의 말이 지꾸 믿기지 않아 뒤돌아보면서 절간을 나온 기억이 있다
요즘은 벼루를 찾지 않는다 먹물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져서 상품화되어 있기에 그 먹물을 사다가 벼루에 부어 농도조절을 하며 쓰곤 한다 붓글씨를 쓰는 게 아니라 캘리그래피를 쓴다 열심히 쓸 때에는 하루종일 쓰기도 하지만 손을 놓으면 일이 년은 그냥 지나간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오늘도 먼지가 뽀얗게 덮인 벼루와 먹물을 보면서 벼루와 먹이 짝이 아니라 벼루와 먹물이 짝을 이룬 모습을 보면서 새삼 세월이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