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죽
호박죽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이다 호박죽은 누런 토종 호박 즉 맷돌 호박으로 만든 호박죽이 제일 맛이 있다 단호박이나 약호박으로 만든 죽보다는 훨씬 맑은 맛을 주는 느낌이다 알고 보니 호박의 종류는 정말 셀 수도 없이 많다 애호박이 늙으면 늙은 호박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애초에 품종 자체가 다르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동양의 호박으로는 애호박 풋호박이 있고 서양종으로 단호박 약호박 대형호박등이 있다 호박은 대체로 좋아하지만 그래도 제일 싫어하는 호박은 주키니 호박이다 길고 녹색을 띠지만 애호박보다도 맛이 못하고 돼지호박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 집에서는 주키니 호박은 쓰지 않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스펀지처럼 뭉클한 맛을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 점 때문에 딱 한번 사 먹어 보고는 다시는 사지 않는다 단호박은 단단하고 늙은 호박보다 단맛이 나고 딱딱하여 보관상 좋고 찌거나 구워 먹는데 용이하다 다만 껍질을 벗기기가 어려워서 껍질을 벗기려면 전자레인지에 넣어 5분 정도 돌린 후에 감자칼로 벗기곤 한다 단호박은 수프나 죽 카레 등에 넣어 먹으면 손쉽게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늘 이런 단호박보다는 잘 늙은 호박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서리가 내리기 전 들녁을 뒹구는 누런 호박을 대하면 마치 인생을 잘 살아낸 사람같다는 느낌이 든다 가을이면 이런 호박 하나쯤은 재래시장에서 사서 거실에 들여놓고 추운 겨울날 호박죽을 끓여 먹는다 그건 엄마가 늘 그랬기 때문이다 집의 울타리가에 심어 둔 호박 넝쿨에서 서리가 내리기 전 잎 사이로 뒹구는 누렇게 익은 호박을 데려다가 인물 좋은 놈으로만 자개 화장대 위에 두고는 아침저녁으로 먼지가 앉지 않게 하려고 수건으로 닦곤 하셨다
언제나 크고 작은 잘 익은 예쁜 맷돌 호박을 서너 개씩 올려놓았다가는 추운 겨울이면 호박죽을 끓이곤 했다 그런 정서를 나도 모르게 그대로 따르고 있는 셈이다
호박을 가르면 특유의 호박냄새가 나는데 나는 그 냄새를 정말 좋아한다 머릿 속에서 호박냄새가 확 꽂혀서 호박이 주는 핀근감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한동안 그 냄새를 맡는다 요리를 하려고 조각 조각내어 자를 때마다 호박냄새는 더 강하게 느껴진다
커다란 냄비에 껍질을 벗기고 씨를 뺀 호박을 넣고 센 불에서 5분 정도 익힌 후 중불로 낮춰서 20분 이상 푹 삶는다 허물어져서 형태가 불분명해지면 식혀서껍질부분은 덜어내고 믹서에다 갈아 준다 여기에 물 200ml 정도를 넣고 찹쌀가루를 풀어 걸쭉하게 끓여낸다 먹기 전에 소금을 조금 넣고 단맛을 좋아한다면 꿀이나 설탕을 조금 넣어 단맛을 부각한다
내는 단맛이 없는 호박죽을 좋아한다 호박 고유의 맛을 좋아하기 때문에 찹쌀가루도 거의 넣지 않는다 엉길 정도만 살짝 넣고 그냥 호박을 푹 삶은 채로 도깨비방망이나 믹서에 곱게 간 엄마가 끓인 호박죽을 더 좋아한다 시중에 파는 호박죽은 쌀가루나 밀가루가 많이 들어가서 껄죽하고 호박 고유의 향이 덜 난다
이번 가을에도 엄마처럼 반듯하게 잘 생긴 누런 맷돌호박을 한 덩이 사야겠다 거실에 놓고 실컷 눈요기를 하다가 추운 겨울에 들면 반으로 갈라 호박 냄새를 즐긴 후에 맛있게 호박죽을 끓여 식구들과 나눠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