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詩集『시인의 친구 』
수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 몇 분에 태어나면서 수로 둘러싸인 채 살아간다
주민등록번호 몇 번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몇 학년 몇 반 몇 학번으로 학교에 입학한다
몇 번 버스를 타거나 몇 번 승용차 번호판을 달고 운전하며 살아간다 집 전화번호는 몇 번이고 휴대전화 번호는 몇 번이다 은행 통장 하나로 카드 운전면허증 신용카드 학위기 의료보험증 수험번호 등으로 참 많은 번호와 더불어 살아간다
수로 실수하기도 하고 기억나지 않아 고생하기도 한다 수를 많이 가지면 더 바삐 움직이게 되고 수를 버릴 때 그와 연관된 삶도 사람도 정리한다 달력의 수를 보면서 지폐의 수를 만지면서 웃고 운다 주식의 지수 앞에서 냉정해지고 고지서의 수 앞에서 숙연하다
때로는 수로 표현되지 않는 것들이 따뜻하다 다정다감 사랑 눈물 추억 휴지 수 아닌 것들이 수로 표현되지 않는 것들이 소리 없이 수와 어울리며 살아간다 세상살이 수 속에 있는 수를 다 헤아리지 못하고 수 밖의 수까지 다 만지는 사람 없다
잃어버린 수 만질 수 없는 수 상상하는 수
수로만 기억되고 판단되는 삶이란 얼마나 옳은 것일까 논리적이고 수치에 강하지 못한 나는 언제나 숫자를 보면 실수를 자주 했다 그렇다고 내가 수학이나 산수를 못한건 아니었다 언제나 수학은 늘 상위권이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오면서 더이상 숫자가내게 필요치 않은 상황이 생기면서 나는 숫자를 경시했다 하지만 처음 주식이 뭔지 알아 갈 즈음에 다시 숫자를 눈에 힘을 주어 봐야 했고 특히 주식을 처음 접하면서 세 자리 숫자마다 점을 찍는데 그걸 읽어내기에 거부감을 느꼈다 왜 이렇게 점을 찍는 걸까 세자리마다 점을 찍으며 단위를 읽어내는 타성에 젖지 못한 나는 적응이 잘 되지 않아 실수를 하곤 했다
뉴스에 가끔 경공매에 동그라미를 하나 더 붙여 실수하여 고가 낙찰을 본 경우가 나오곤 하는데, 아마도 난독증이거나 숫자에 약한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고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 나는 절대로 숫자로 실수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다짐을 스스로 하곤 했다
세자리 숫자마다 점을 찍는 것은 여전히 내게 당혹스러웠다 예전부터 늘 있어 왔던 일이지만 내게만은 새롭고 어려웠다 그만큼 숫자에 무신경하게 살아왔다
어느 날부터 나의 머릿속은 숫자들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여기서도 저기서도 숫자들은 얼굴을 내밀었다 '나도 숫자야' '나도 숫자야' 하면서 숫자들은 내가 살아가는 시공간에서 불쑥불쑥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나와 무관한 숫자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렇게 숫자에 무지하게 살아온 것일까 하지만 나는 다시 학창시절의 숫자에 민감했던 나로 돌아가 있다 그리고 그 숫자들에 다시 관심을 가지고 다루게 되었다 물론 실수는 잘 하지 않는다 다만 수많은 반복된 숫자를 셀 때에는 세고 세고 또 눈에 힘을 주어 세곤 한다
이전과는 달리 수에 대한 감각이 많이 달라진 나에게 숫자들은 다시 와서 얼굴을 내민다 '나도 봐줘' '나도 챙겨줘' '나랑 같이 가자'
나는 다시 숫자들과 꽤 많이 친해졌다 아니 수에 익숙해졌다 열개의 다른 글자가 수많은 의미들을 품을 수 있는 마법같은 숫자에 어떻게 무관심 할 수 있었던지 의문이 든다 또 언젠가는 시처럼 숫자들과도 친한 친구가 되어 있을 예정이다 숫자는 시처럼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나와 함께 나이를 들어가는 또 하나의 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