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육아맘의 시점
2017년 3월에 농가주택과 땅을 구매하고, 집수리 비용을 지원받아 현관문, 창문 교체 등 일부만 수리를 했다. 귀농귀촌센터의 사무국장님 도움으로 그 해 5월에 셀프이사를 했다. 마당을 아이들 놀이터로 만들고 싶었으나 밤호박 농사가 한창이어서 장난감을 꺼내 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밤호박 수확을 앞두고 있던 7월, 남편이 귀농인에게 집들이 비용이 지원된다며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집들이를 하자고 했다. "집들이를 해 볼까"도 아니고 "하자~"였다.
굳이? 친구나 가족도 아니고 마을 어르신들???
요리 똥손이었던 나에게 마을 집들이는 날벼락이었다. 입이 또 튀어나왔다. 튀어나오는 내 입과는 상관없이 남편은 이장님과 집들이 날짜를 의논하고 모든 것을 빠르게 진행시켰다. 날짜가 정해지고, 부녀회 어머님들과 함께 장을 보고, 음식도 거의 다 어머님들이 해 주셨다. 다행이었다. 내가 한 거라곤 접시에 담긴 음식들을 나르며 웃는 얼굴로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드세요~"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점심 즈음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집들이가 끝나가고 있었다. 해남에서 남편과 함께 SNS 마케팅 교육을 받던 동기 몇 분이 찾아오셨다. 남편에겐 예고된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예정된 일이 아니어서 당황스러웠다. 마을 어르신들은 식사를 끝내고 자리를 비우셨다. 어르신들 대접만 하면 끝날 줄 알았던 집들이는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화가 나는 건지 목이 마른 건지 맥주를 계속 마셨다. 낯선 이들에게 붉게 상기된 얼굴은 맥주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이렇게 시작된 집들이는 하루 만에 끝나지 않았다.
"야, 그 소식 들었어? 마을에 이사 온 젊은이네가 집들이한대~"
"놀러 가자~"
남편은 처마에 앉은 제비들을 통신망으로 이용한 걸까. 우리의 집들이가 제비의 지저귐을 타고 남편 친구들에게도 전해졌나 보다. 마을 어르신들과 동기님들의 집들이가 있은 바로 뒷날, 남편의 고향 친구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그 말을 마을 어르신들과 식사 자리에서 나에게 전했다. 맥주를 연신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오는 친구들이라 오후에 도착예정이었다. 마을 집들이 끝낸 뒷날, 당일 아침부터 장을 보고 바빴다. 하룻밤 자고 가는 일정이라 이불도 구입을 했다. 딸들과 또래의 아이들도 있는 세 가족이 온다고 해서 모든 것을 넉넉하게 준비했다. 밥도 햇반으로 준비했고 무슨 정신으로 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은 간단히 먹고 네 가족이 함께 해남 나들이를 다녀오고 나서야 집들이는 끝났다.
내 인생 첫 집들이를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할 줄 몰랐다. 게다가 3일간이나 집들이를 할 줄 짐작도 못했다. 지금에 와서야 집들이 비용을 지원받으려면 원주민인 마을 어르신들과 해야 한다는 걸 안다. 집들이 비용 지원의 의도가 원주민과의 화합을 통해 빠른 정착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친구나 가족들이 아니라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집들이를 하는 이유에 대해 남편이 내게 한마디라도 해줬더라면, 튀어나온 입이 반은 들어갔을 것이다.
아이들이 내 세상의 전부였던 육아맘 시절의 거대한 마을 집들이에 대한 두려움은 이장님과 부녀회의 도움으로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지역별로 마을마다 분위기가 다르겠지만 우리 마을의 경우 젊은 사람들의 귀농을 반기는 분위기여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든든한 아군이 되었어야 할 남편보다 부녀회 어머님들이 더 내 편 같았던 마을 집들이였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가고자 한다면 길은 열리는 것 같다. 마을 집들이도 한 번쯤 해볼 만하다. 이때 아니면 언제 휴지부자가 되어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