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신 정신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저자의 정신 안으로 들어가는 것'
"해석에서 본질적인 지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신의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서 저자의 정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_슐라이어마허
[ 목차 ]
1. 해석학의 정의를 위하여
2. 해석학 연구에서 무엇을 얻기를 소망해야 하는가?
3. <철학적 해석학>과 <전통적 철학적 사유>의 차이
4. 예비적이고 잠정적인 이해(선이해)와 해석학적 순환
1. 해석학의 정의
해석학: 특별히 우리가 사는 시대와는 상이한 시대 또는 상이한 삶의 컨텍스트 속에서 기록된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고 다루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
성경해석학: 우리가 성경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이해하고 적용하고 반응해야 하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탐구하는 것
- 19세기,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연구를 거치면서 학문 분과를 이룸
학문하는 방식
-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제기
- 우리가 이해에 이르는 방식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제기
- 텍스트 유형과 텍스트 읽기의 과정에 대한 <문학적> 질문과 관련
- 우리의 계급, 인종, 성, 선행되는 믿음과 관련된 기득권이 어떤 방식으로 텍스트 독해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사회적>, <비판적>, <사회학적> 질문을 포함
- 커뮤니케이션 이론이나 일반 <언어학> 이론을 끌어와 활용, 어떤 내용이나 효과가 독자나 공동체에게 전달되는 과정 전반을 연구하기 때문
성경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신뢰할 수 있는 해석이 되려면)...
성경의 텍스트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해석이 되려면 '선이해'가 있어야 한다. 즉 구약과 신약 개론 및 주해를 포함해 성경 연구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 자료를 참조해야 한다. 동시에 해석학의 역사나 텍스트 수용이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기독교 신학과 정경의 문제도 무시해서는 안된다.
아울러 해석학 내부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은 그것이 아무리 사변적이고 원리적으로 보일만정 실천적 질문에 관련됨
예를 들어, 과연 텍스트의 의미는
- 독자에 의해 "구성되는"(constructed) 것인가?
- 아니면 저자에 의해 그냥 "주어지는"(given) 것인가?
위의 질문에 의해 본질적으로 실천적 질문도 도출되기 때문에 여기에 대답할 길을 모색해야 한다.
- 성경은 독자인 우리가 의도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의미할 수 있는 책인가?
- 우리는 타당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성경해석을 위한 규범이나 기준에 대해 합의에 이를 수 있는가?
해석학의 발전
19세기의 종교개혁까지는 해석학을 "성경 해석을 위한 규칙들"로 정의되는 수준이었다. 즉 해석학이란 대체로 일종의 <주해> 또는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주해에 착수하기 위한 규칙들>을 의미한다고 정의하였다.
19세기 슐라이어마허와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한스-게오르크 가다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석학은 기술(Art) 보다는 학문(science)의 개념을 가지게 된다.
그럼에도 해석학을 위해서나 텍스트 해석을 위해서 일련의 "규칙들"을 정식화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랜 역사를 지닌 관념으로, 일부 영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초기 랍비 전통 속에 있는 <해석을 위한 규칙들>이 이와 연관된다.
초기 랍비 전통 속에 있는 이러한 해석의 규칙들은 '신성한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고착된 랍비 전통 속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과 이런 초창기의 정식들은 해석학이라기보다는 연역 논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해석의 <규칙>이라는 개념
해석의 "규칙"이라는 개념은 무오류하고 결함 없는 정경 개념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보수적인 기독교 저자들이 자주 의지해온 개념이다. 아울러 이런 보수적인 저자들은 오류 가능성이 있는 인간의 해석이라는 개념이 성경 텍스트의 실제적 활용에 있어 성경의 권위의 전달이라는 연결 고리에 약한 연결 지점을 제공하는 듯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와 관련하여 밀턴 테리는 가장 보수적 성경해석학을 주창한 사람으로 해석학이 "학문인 동시에 기술"이라고 가르쳤다. (기계적으로 원리들을 열거하고 사실과 결과를 분류하고 그러한 문서의 해독을 통해 어떤 적용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고 본 듯)
이러한 테리의 연구는 "원천"으로서의 성경 텍스트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반면 슐라이어마허와 가다머의 해석학에서는 "이해의 기술"로 재정의 했다. 이들이 주목했던 것은 독자의 지평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들의 관점은 커뮤니케이션이 단순히 텍스트 또는 화제의 원천을 통해 <전해지는> 것만을 기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독자 또는 목표 청중에게 <전달되고> 그들에 의해 <이해되며> 그들에 의해 <전유된> 것이 무엇인지를 기술한다고 보았다. 일반언어학에서 사용한 전달자와 수용자의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 커뮤니케이션은 사건이나 행동에 있어 저자, 텍스트, 독자를 동시에 관련시키는 <전체 과정>에 대한 관심은 <해석학>을 <주해>와 구별해 준다.
해석학의 정의에 대한 결론
<주해와 해석>은 텍스트를 해석하는 <실제적 과정>을 지시하는 반면 <해석학>은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고 적용할 때 우리가 행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묻는 이차적 과제를 포함한다. 해석학은 책임감 있고 타당하고 풍요로우며 적합한 해석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 작동하는 <조건과 규준들>을 탐구하는 학문이라 하겠다.
2. 해석학 연구에서 무엇을 얻기를 소망해야 하는가?
수강했던 학생들의 소감
-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성경을 읽게 되었다.
- 해석학이 가진 다학제적 성격이 신학 연구에 통합적 차원을 제공받았다.
- 대립하는 견해들 사이에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공감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움을 받았다.
- 성경해석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이해>라는 것이 진리가 드러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는 것처럼 성경해석도 동일한 원리 같다는 의미.
다학제적 해석의 특징
슐라이어마허, "해석에서 본질적인 지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신의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서 저자의 정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저작 당시의 상황에서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역사적 연구>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빌헬름 딜타이, "우리가 저자 또는 대화 상대방을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그의 입장에 서는 것이 필요하다"(감정이입, 자리바꿈의 차원과 연결됨)
루돌프 불트만, 인간 이해든 텍스트 이해든 간에 이해하려 추구하는 대상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어야 함을 주장
에른스트 푹스, 해석학의 핵심부에 위치하는 것은 '감정 이입' 또는 '상호적 이해'라고 주장
에밀리오 베티, "해석학은 관용, 상호 존중 및 인내심과 고결함을 수반하는 상호 간의 경청 능력을 길러준다"
3. "철학적 해석학"과 전통적인 철학적 사유의 차이
가다머와 리쾨르 등 철학적 해석학자들의 접근법은 합리론(데카르트)과 경험론(데이비드 흄) 등의 철학적 사유와 대립 관계라고 거칠게 정리할 수 있다. 즉 해석학은 그 정신과 관점에 있어서 세속적 계몽주의의 합리론과 그것을 계승한 자연과학 즉 모든 인문적 지식을 통제하는 모형으로서의 자연과학의 신성화로부터 아주 멀리 벗어났다고 보고 있다.
<철학적 해석학>과 <철학적 사유>와의 차이점
개방성을 가지고 경청하려는 독자의 수용성에 더 근본적으로 의존하는 해석학은 철학적 사유와 차이를 보인다.
"우리가 텍스트를 번역하기 전에 텍스트가 우리를 번역해야 한다"
(에른스트 푹스)
(로버트 펑크의) 해석
대상 본문 (누가복음 15:11-32)
해석
로버트 펑크는 <탕자의 비유> 해석에서 이 비유가 집중하는 대상은 탕자인 둘째 아들뿐만 아니라 그의 형인 <큰아들의 태도>에도 있음을 전한다. 즉 탕자를 아낌없이 관대하게 환영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원망하면서 큰아들은 그 분노를 폭발시켜 환영의 자리에 함께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큰 아들이 '동생의 행위와 그 대가'로는 극도로 부당해 보이는 '환대의 모습' 사이에 있는 <괴리>를 보았기 때문에 터져 나온 것이다.
큰 아들은 스스로 '자신은 의롭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될만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동생은 말 그대로 탕자 즉 이미 죄인이라고 판명된 자라는 것이다.
로버트 펑크는 여기에서 제시되는 텍스트(성경 구절, 은혜의 말씀)가 작은아들과 큰아들을 죄인과 바리새인으로 분리시킨다고 전한다. 즉 앞에서 에른스트 푹스가 얘기한 것과 같이 "우리가 비유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가 우리를 해석한다"라고 한 것에 해당되는 바라는 것이다.
아울러 고려되어야 할 것은, 지금까지 언급한 <설명>과 <이해> 즉 철학적 접근과 해석학적 접근의 구분법으로 어느 하나만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를 보완적으로 활용해야 '더 창조적인 해석'이 가능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4. 예비적이고 잠정적인 이해(선이해)와 해석학적 순환
'선이해'는 독일어온 단어로 슐라이어마허로부터 전개된 독일 사상에서 널리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선이해(先理解) 요약
선이해의 의미
독일어에서 ‘선이해’를 나타내는 단어는 ‘Vorverständnis’이다. 이 단어는 ‘vor’(앞서)와 ‘Verständnis’(이해)의 합성어로, 어떤 대상을 이해하거나 해석할 때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파악이나 이해를 의미한다. ‘선이해’는 철학, 특히 해석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는데 하이데거와 가다머와 같은 철학자들이 이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모든 이해가 어떤 형태로든 선이해에 기반한다고 주장했다.
선이해의 특징
모든 해석의 출발점: 선이해는 모든 명시적 해석의 주제 영역을 한계 짓는다.
문화와 역사의 영향: 선이해는 개인의 문화, 역사, 전통에 의해 형성된다.
이해의 기본 조건: 선이해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변화 가능성: 선이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과 해석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
[조각 퍼즐 맞추기(유비)]
○ 파란색 퍼즐을 집어 들었다면 하늘이나 바다에 해당할 것이라고 추정
→ 해당 부분에 퍼즐을 맞춰보려고 시도할 것
○ 또 다른 조각이 동물의 다리 형태의 짙은 색 선을 갖고 있음
→ 그런데 이 조각은 처음의 추측과는 달리 동물 다리가 아닌 다른 대상의 일부일 수 있음
○ 새로운 조각을 집어들 때마다 우리는 머리에 처음 떠오르는 추측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림을 맞춰보려고 함
→ 어떤 판단은 잘못된 것, 또 다른 판단은 예측과 맞아떨어지기도.
☞ 어쨌든 전체 과정을 진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 조각이 무엇을 표상하며, 또 전체 그림에 어떻게 맞춰질 수 있는지에 대한 가정을 가지고 있어야 함
☞ 결국 전체 그림이 드러나는 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이 조각이 진짜로 어디에 속하는지, 무엇을 표상하는지 확실히 알게 될 것
➤ 이 유비는 '선이해' 및 '해석학적 순환'의 개념을 둘 다 포괄하는 것임
해석학적 순환
의미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 circle)은 텍스트나 의미를 이해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중요한 해석학적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부분과 전체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강조.
해석학적 순환의 핵심 개념
부분과 전체의 관계: 텍스트의 개별 부분은 전체 맥락에서 이해되며, 전체는 개별 부분들의 이해를 통해 파악.
순환적 이해 과정: 이해는 부분에서 전체로, 다시 전체에서 부분으로 계속해서 순환하며 발전.
선이해의 역할: 모든 이해는 어떤 형태로든 선이해(선입견)에 기반.
해석학적 순환의 발전: 이 개념은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발전
프리드리히 아스트: 18세기말에 처음으로 이 개념의 초석을 닦았음.
슐라이어마허: 해석학적 순환을 텍스트의 장르와 저자의 개성에 적용.
딜타이: 의미의 맥락 의존성을 강조하며, 무전제적 이해의 불가능성을 주장.
하이데거: 이해의 선구조(Vorstruktur)를 강조하며, 순환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확장.
가다머: 순환을 긍정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로 해석.
해석학적 순환의 의의
이해의 본질: 이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발전하는 과정임을 보여줌.
선입견의 인정: 완전히 객관적인 이해는 불가능하며, 모든 이해에는 선입견이 작용함을 인정.
맥락의 중요성: 개별 요소는 항상 더 큰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
해석의 지속성: 텍스트나 의미에 대한 해석은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발전될 수 있음을 시사.
해석학적 순환은 단순한 논리적 오류가 아니라, 이해의 본질적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개념. 이는 우리가 텍스트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
이미 앞의 퍼즐 맞추기 유비에서 살펴보았듯이 '부분이나 조각을 검토한 후 전체 그림에 대한 이해 안에서 그 조각을 연관시키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 개별 조각을 검토하지 않고서는 그림 전체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과
- 동시에, 전체로서의 큰 그림의 특정 의미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개별 조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정리를 말이다.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개념은 "해석학적 순환이 어떻게 성경 텍스트의 독해에 지속적으로 작용하는지" 하는 것이다.
바울서신을 예로 살펴보면,
- 바울 서신의 행이나 구절들에 대한 주해와 주석은, 바울 신학 전체에 빛을 비추어줄 수 있다.
- 바울 신학에 대한 섬세하고 적절한 이해는 바울 서신서들의 각 행과 구절에 대한 주해와 해석들이 서로 갈등할 때 그 씨름을 발전적 방향으로 진전시키는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쌍방의 원리는 크리스티안 베커 등의 학자에 의해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학습을 통해 이러한 각각의 개별 이론들을 정립해 나가도록 하겠다.
참고서적
<앤서니 티슬턴의 성경해석학 개론> 새물결플러스,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