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이튿날 다시 장례식장을 찾았다. 혹여나 엄마에게 물어보니 안 가겠다고 했다. 할머니가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의중을 알 수 없지만 할머니께서 물이라도 한 모금하셨는지 걱정이 되어 찾아갔다. 할머니 손을 잡고
"할매, 뭐 좀 먹었어? 국이라도 먹지. 퍼올까? 아님 죽이라도 사 올까?"
"안묵을란다."
"물이라도 마시지. 뭐 필요한 건 없나?"
"집에 떡국 떡 좀 사다놔라. 할매가 잘 가는 떡집 알제? 거기서 두 봉다리 사라. 그 아니라도 된다.아무데나가서 떡국떡 사놓고 온나. 내일 장례 끝나고 가족들 먹을 음식은 있어야지."
"딴 건?"
"읎다."
할머니는 호주머니에서 뽀시락 거리며 열쇠와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셨다. 난 축 쳐져 있는 할머니 손을 만지작 거리다 일어났다.
'어제부터 한술도 뜨지도 않은 사람이 내일 식구들 먹일 음식 걱정을 하고 있다니... 왜 그걸 신경 쓰지.. 자식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할매도 참...'
장례식장에 나와 떡 두 봉지를 사 할머니 집으로 갔다. 문 열고 들어가자 평소와 다른 무거운 집안의 공기가 느껴졌다. 내 눈앞에 갈색 필터가 깔린 공간을 보는 듯했다. 아무도 없는 집 안의 공기가 이렇게 무거운 것인지. 이 공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인지. 내 마음이 무거운 것인지. 그날을 다시 떠올려보면 갈색 풍경만 떠오른다.
떡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걸레를 빨아 집안 구석구석 청소했다. 할머니는 평소 청소에 서툴러 많이 지저분하다. 그래서 엄마는 할머니 집에 가면 잔소리하며 청소를 해주었다.엄마를 도와 할머니집 청소를 종종 했었다. 혼자 청소를 하다 보니 엄마 생각이 더 많이 났다. 그러다 비디오 테이프를 발견했다. 할아버지 환갑 잔치 비디오 테이프 였다. 할아버지 추억할 겸 틀어보았다. 그 속에 활짝 웃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 속에 할아버지는 건장하고 커보였다. 좋은 추억도 나쁜 추억도 아닌 까먹고 있던 내 모습을 보니 어색하기도해서 더 이상 보기 싫었다.
8살, 고운 분홍 한복 입고 이모 손을 잡고 호텔 뷔페 간다며 신이 난 아이였다. 처음 와본 공간이라 그저 신기하고 잔치가 열리니 현수막에 화려한 잔치상에 마구 들떠있었다. 손님들이 하나 둘 들어오자 바짝 긴장했다. 어른들과 인사할 때마다 주눅이 들었다. 이모 한복 옷자락을 꽉 잡고 슬쩍 뒤에 숨어 인사했던 게 기억에 있다.
인사를 하고 나면 어른들이 엄마 흉을 보며 나를 언짢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딜 가든 예쁘다는 눈빛만 보다 꼭 할아버지 쪽 식구들만 보면 눈칫밥이었다. 특히 고모할머니가 제일 무서웠다.
"너 애미는? 미숙이는 안 왔냐? 썩을 년!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만 딱 그 짝이네." 하며 내 앞에서 엄마 흉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땐 엄마가 어디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물어보면 모른다고 대답했다. 잔치가 시작되고 구경하느라 곧 엄마를 까먹었다. 난 손녀라 할아버지 볼에 뽀뽀를 하고 손주인 사촌은 할머니 볼에 뽀뽀했다. 사람둘 앞에서 할아버지는 자상한 눈빛으로 날 안아주었다. 나 혼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훗날 커서 엄마가 누군가에게 지난날의 서러움을 토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설움의 날에 할아버지 환갑잔치 일화도 담겨 있었다. 환갑잔치 전 할아버지가 엄마를 불러 돈을 주셨다. 그 돈을 주며 동생들 입힐 한복 맞춰오라고 했다. 그 한복 맞추는 돈에는 엄마껀 없었고 엄마는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나만 보내라고 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날 가족들 다 호텔에서 신나게 먹고 놀 동안 할머니 집 청소하며 손님맞이를 잘할 수 있게 그릇들 수저들도 다 꺼내 씻고 정리했었다고 했다. 딱 우렁각시였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난 눈물이 났다.
사실 어린 마음에 매번 행사에 빠지는 엄마가 이해 안 되고 밉기도 했었다. 엄마 때문에 내가 눈칫밥 먹는 게 너무나도 싫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엄마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날 할머니 집을 청소하면서 우렁각시처럼 청소하던 엄마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청소를 마치고 열쇠를 돌려주러 다시 장례식장에 갔다. 열쇠를 주고 바쁘게 일하는 숙모와 인사하고 나니 상복을 입은 사촌 동생이 보였다. 나에게 미소를 띠며 인사하기에 다가갔다.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이모는 마치 상족도 하면 안 될 사람과 딸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냐는 식으로 나와 떼어놓았다. 직접적인 말은 하지 않아도 차가운 말투와 눈빛이 이미 내가 추억하는 이모가 아니었다. 이모의 행동에 숨이 안 쉬어지고 답답했다. 이모를 좋아하고 잘 따르던 어린아이의 손을 이모가 놓아 버렸다. 그래도 아직은 나에게 이모였다.